ART
느려서 친밀한 갤러리
갤러리스트 토마소 칼라브로가 20세기 초현실주의 작품을 화이트 큐브가 아닌 자기 집에 전시하는 이유.
타이거 타테이시, 이스마엘레 노네스, 그리고 미켈레 부바코의 그림이 나란히 놓여 있다. 각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공간 안에서는 한목소리로 울림을 만들어낸다.
베네치아의 산 폴로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곤돌라를 타려는 관광객들과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현지인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광장 건너편에 자리한 14세기 팔라초 도나 브루사의 묵직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갤러리와 집의 경계를 없애고 싶었어요.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지금 가장 주목받는 갤러리스트 중 한 사람인 토마소 칼라브로(Tommaso Calabro)의 설명을 들으며 내부로 들어서자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와 해럴드 스티븐슨(Harold Stevenson)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일상의 오브제들과 어우러져 있다.
높은 층고의 복도 끝, 갤러리와 주거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침실 한쪽에는 파올로 피바가 디자인한 라운지 체어가 자리하고, 그 뒤로 로돌포 아리코의 작품이 걸려 있다.
작년 4월에 완성한 이곳은 전형적인 갤러리와는 거리가 멀다. 갤러리이면서 동시에 칼라브로의 집이기 때문이다. 2018년 9월 밀라노에서 갤러리를 처음 시작한 35세의 칼라브로에게 베네치아 공간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런던에서 헬리 나마드 갤러리를 이끌고 소더비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자신이 꿈꾸던 갤러리를 만들기 위해 독립했다. “집과 갤러리를 한 공간에 두니까 제가 추구하는 예술의 모습을 방문객들에게 훨씬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더군요. 미술과 가까이 사는 삶을 직접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베네치아는 칼라브로의 신념을 한층 더 깊이 물들였다. “세상에 베네치아 같은 도시는 없어요. 사실 도시라는 느낌도 들지 않죠. 꿈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베네치아는 수많은 섬과 수백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어요. 대리석이 빛을 반사하는 다리 위에서 운하를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두 배로 보이곤 하죠.”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오가며 생활하는 그에게 두 도시의 차이는 분명하다. “베네치아는 대부분의 도시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휴가지 분위기를 풍겨요. 업무차 방문한 사람들조차 주변의 초현실적 분위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되죠.”
레오노르 피니, 스타니슬라오 레프리, 해럴드 스티븐슨의 작품들로 벽을 채우고, 그 아래에는 마리오 벨리니의 오렌지 체어와 빈티지 가구들을 놓아 예술과 생활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흐려지는 풍경을 만들었다.
칼라브로의 컬렉션과 전시 프로그램에는 명확한 철학이 담겨 있다. 초현실주의와 구상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20세기에는 명성을 누렸지만 현재는 잊힌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구상예술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미적 감수성에서 나오죠. 저는 항상 예술가들의 삶에 매료됐어요.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흥미롭고 놀라운 삶들을 발견했죠.”
칼라브로가 추구하는 ‘느린 갤러리’ 개념은 현재 주류 미술계의 관람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아트페어나 하얀 벽의 전시장들과는 정반대예요. 제가 운영해온 갤러리 공간들은 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경험을 제공합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건축 공간에서 예술을 만나고, 무엇보다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며 커피나 프로세코 한잔을 나눌 수도 있죠.” 이런 접근 방식은 1960~1970년대에 번성한 갤러리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 시대의 갤러리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상업적인 접근 방식에 밀려 사라졌어요. 저는 그런 문화를 되살리고 싶어요.”
갤러리에서 거주 공간으로 이어지는 숨겨진 문 하나가 칼라브로의 모든 생각을 담고 있다. “방문객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갤러리와 집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죠. 그때 비로소 예술이 삶의 일부라는 걸 체감하게 되는 거예요.” 팔라초 도나 브루사는 한때 유명한 후원자이자 예술가 가문인 폰세카 가족의 저택이었다. 시그눔 재단(Signum Foundation)의 본부로도 사용되었던 이 건물을 선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치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잖아요. 여기에서라면 제가 꿈꿔온 ‘느린 갤러리’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카를로 스카르파의 테이블과 지오 폰티의 체어 뒤로 해럴드 스티븐슨, 미켈레 부바코, 마리오 데 루이지, 아델리사 셀림바시치의 작품이 보인다.
칼라브로의 예술에 대한 애정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정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 “예술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 제 선택과 작업의 방향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죠.” 저는 여전히 인쇄물, 포스터, 판화의 일종인 리토그래프에 깊은 매력을 느끼는데, 이런 관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할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거예요.” 이는 그가 알렉산더 이올라스(Alexander Iolas)라는 전설적 갤러리스트에 대한 오마주 전시 <카사 이올라스>를 기획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올라스에 주목하게 된 진짜 동기는 1950~1960년대에 그가 제작하고 출간한 놀라운 카탈로그들 때문이었어요. 작품을 구입할 여유가 없을 때는 대신 그의 카탈로그를 샀거든요.”
현재 그는 밀라노의 코르소 이탈리아 47번지와 베네치아의 캄포 산 폴로 2177번지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5월에는 뉴욕 첼시에 팝업 갤러리도 열었다. “밀라노는 디자인, 패션, 금융 면에서 국제적인 도시예요. 하지만 베네치아는 예술 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곳이죠.” 실용성 면에서는 밀라노가 훨씬 낫지만, 두 도시의 삶의 리듬은 완전히 다르다. “밀라노에서는 사람들이 시간을 따로 할애해 예술을 즐기는 경향이 있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예술이 일상의 일부죠.”
갤러리스트 토마소 칼라브로.
거주 공간 곳곳에는 칼라브로의 섬세한 큐레이션이 돋보인다. 거실 중앙에 놓인 지오 폰티(Gio Ponti) 의자와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가 1968년 디자인한 도지 테이블은 그저 아름다운 디자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에요. 스카르파의 테이블은 지금 카시나 컬렉션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원본의 무게감은 전혀 다르죠.” 벽면에 걸린 이스마엘레 노네스(Ismaele Nones)의 ‘아반티 포폴로’와 이젤에 놓인 타이거 타테이시(Tiger Tateishi)의 작품은 공간에 강렬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이 두 작품을 거실에 배치한 것은 제가 깊이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에요. 이스마엘레 노네스의 작품은 제가 처음 구입한 작품이거든요.”
“집에 디자인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게 제 전시 스타일이에요. 갤러리든 개인 공간이든 결국 제 취향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거니까요.” 클로드 랄란(Claude Lalanne)의 달팽이 조각상, 베네치아의 인칼미에서 제작한 화병, 침실에 놓인 마리오 벨리니(Mario Bellini)의 오렌지 체어까지. 모든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각각의 오브제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해요. 주로 고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을 고르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을 묻자 주방을 가리킨다. “아침마다 주방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베네치아 레드 벽면과 파스텔론 바닥, 노출된 서까래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속에서 말이에요. 창밖으로는 가끔 곤돌라가 지나가고요.” 향후 비전에 대해서는 신중한 답변을 내놓는다. “미술 시장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트렌드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진실하고 자신만의 비전, 미학, 열정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것이에요. 이런 진정성이야말로 제 공간을 경험하는 컬렉터들과 방문객들에게 명확한 의미로 다가가거든요.”
WRITER
우주연(리빙 칼럼니스트)
EDITOR
백가경
PHTOGRAPHER
마르코 베르톨리니(Marco Bertol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