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도시를 읽는 능력

도시설계학자 김세훈은 도시의 움직임과 공간의 변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통해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한다.

도시설계학자 김세훈 사진

체크 패턴 셋업 슈트는 GOLDEN GOOSE. 이너 셔츠는 RECTO. 옥스퍼드 슈즈는 DR. MARTENS.

인간의 일상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펼쳐진다. 즉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인식, 경험뿐만 아니라 삶의 구조를 규정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교육받아왔다. 평생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애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공간에 대해서는 깊이 배우거나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시간의 중요성과 달리 공간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죠. 누구도 어느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든지, 쉴 때 어느 공간을 가라고 제안하지 않아요. 사람을 만날 때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기 좋은 공간은 어딘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살아온 것이 돌아보니 아쉬웠어요.” 이렇듯 공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인물은 25년 동안 도시를 ‘덕질’해온 도시설계학자 김세훈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와 공간을 연구 중이다. 건축학과 출신답게 개별 건물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일을 해오다가 도시 연구에 뜻을 두고 지난 13년간 도시 설계 강의와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과 통찰을 책 <도시 관측소>에 담았다.
책의 부제는 ‘유동하는 도시에서 나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나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도시 관측력’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명명한 도시 관측력은 공간의 가치와 맥락을 읽고 그 의미를 자신의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능력이다. “나만의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을 트레이닝하는 일종의 가상 공간을 ‘도시 관측소’라고 이름 붙였어요. 나만의 도시 관측력을 키울 수 있는 곳에서 관측의 내공을 키우자는 화두를 사회에 던지고 싶었어요.” 그는 공간을 보는 해상도를 함께 높이자고 제안한다. 공간을 읽는 능력이 우리의 삶을 설계하는 힘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도시관측소 책 표지 사진

격변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도시를 관측하는 힘이다. 김세훈 교수는 도시의 변화와 우리의 미래를 연결하는 능력, 즉 도시 관측력에 집중한다. 그의 책 <도시 관측소>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 삶을 설계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도시 관측소>를 출간하고 ‘도시 관측 챌린지’를 운영하면서 도시와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는 일을 해왔습니다. 도시를 누가 만드는지 생각을 해보면 주체가 한둘이 아닙니다. 공공, 민간, 개인 등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전문가가 논의를 주도하며 도시를 결정해왔어요. 그런 다음에 사람들이 그 안에 자기의 삶을 집어넣는 과정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취향이 다양해지고 눈높이가 높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도시와 공간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도시 담론의 접점을 만들고자 <도시 관측소>를 쓰게 되었죠. 책을 쓰면서 이 과정 자체를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해보고 싶어졌어요. ‘도시 관측 챌린지’라는 프로그램을 100일 동안 운영하면서 도시와 공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참여시켰어요. 같이 글을 쓰고 토론하고 오프라인 미팅을 하면서 도시에 대한 담론을 확대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서울에서 살기 좋은 집이란 무엇인가’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곳은 어떤 공간인가’ 같은 화두들을 던지며 함께 아이디어를 키워나가고자 했어요. 우리의 공간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읽어내는 것이죠.
앞으로는 개인의 취향과 감각을 존중하고 반영하는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날까요? 과거에는 누군가 도시를 만들면 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개념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아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기준이나 삶,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는 도시라면 선택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어요. 이제 개개인은 도시와 공간에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하죠. 그래서 그에 걸맞은 공간을 창조해야 하고, 결국 그런 공간만이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공간에는 여러 콘텐츠가 담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가가치가 쌓이죠. 결국 선택받는 공간과 그렇지 못해 버려지거나 무관심 속에 잊히는 공간으로 점점 양분되고 있는 거예요.

이태원111의 루프톱 사진

김세훈 교수와 방문한 공간 이태원111의 루프톱으로 올라오는 계단. 나무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책의 부제 ‘유동하는 도시에서 나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일종의 선언처럼 들립니다. 책을 읽으면서 도시를 진단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나의 일상을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여러 철학자가 이야기했듯 도시가 유동한다는 것이 핵심이죠. 이런 현상이 대세일 뿐 아니라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삶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죠. 회사의 유연근무처럼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면서 공간을 둘러싼 법칙이 바뀌고 있어요. 외부의 여러 법칙이 바뀔 때 내 기준이 없으면 삶이 그저 흘러갈 수 있어요. 흔히 ‘좋은 집이란 무엇이다’라는 남들이 정한 기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휩쓸려 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해요. 내 행복을 위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과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크게 다르죠. 그래서 저는 공간을 바라보는 해상도를 높이자고 제안합니다.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와 정기용 건축가의 책이 공간에 대한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때 미술관, 문화 공간 등을 돌아다니면서 내 마음의 공간을 찾았던 것 같아요. 역시 <도시 관측소>를 읽으면서 다시 공간이 삶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정기용 건축가의 말을 제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결국 삶과 공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인 것 같아요. 도시와 공간을 바라볼 때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비싼 공간일수록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공간을 소유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큰 비용이 드는 일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사실 내가 돈을 낸다고 해서 사용하는 모든 공간을 소유할 수는 없어요. 결국 그 역할을 대신하는 시스템이 도시예요. 필요한 것들을 사회가 함께 공동 구매하는 셈이에요. 어떤 것은 공공이 개방하고, 또 어떤 것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여러 사람이 쓰도록 열어두는 방식이죠. 그런데 이 시스템이 점점 작동을 멈추고 각자가 자기 땅에 자기만의 성을 짓겠다는 방향으로 흐르면 사회는 각박해질 수밖에 없어요. 소수가 독점하는 사회로 흘러가게 되죠. 진정한 풍요로움은 내가 소유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을 보내는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누구와 어떻게 향유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산업화 시대의 성장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저출산 등 위기로 인해 한국의 성장은 끝나간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죠. 반면 책에서는 ‘축소 성장’을 제안해서 인상적이었어요. 비수도권의 중소 도시, 광역시의 인구는 무너지고 있어요. 서울은 주거 역할을 수도권의 다른 도시들에게 넘겨줬죠. 그래서 서울은 인구 위기 도시로 보기는 어렵고, 진짜 큰 문제는 지방이에요. 경제 성장기에 인구나 자본이 계속 축적되면서 도시가 성장했지만, 이제 그 방식은 끝났어요. 우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고,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중소 도시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죠. 예전에는 100만 명이 태어나는 나라였다면, 지금은 20만 명대가 태어나는 상황에서도 도시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운영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그래서 책에 몇 가지 처방을 제시했어요. 인구 감소 지역의 전략으로는 도시 핵심 기능을 한데 모으는 ‘콤팩트 시티’, 그리고 축소하되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스마트 축소’ 같은 개념을 소개했죠.

이태원111의 루프톱에서 바라본 이태원 사진

이태원111의 루프톱에서는 복잡성과 다층적인 매력을 지닌 도시, 이태원의 스카이라인을 관측할 수 있다.

인구 대신 재능을 움직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재능의 유동화가 생존 전략이 될 수 있을까요? 경제활동인구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는 다재다능하고 부지런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교육 수준도 높고요. 여러 전천후 포지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역량이 가장 큰 강점이죠. 그래서 도시를 물리적으로 키울 수 없다면, 핵심 구성 요소인 사람들의 재능을 유동화해 여러 영역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 되면 노동력이나 인구 풀은 줄어들더라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와 다양성, 창의적인 목소리는 줄지 않게 됩니다. 결국 도시 전체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 거죠. 세계적으로 인구가 3분의 1 가까이 줄어든 도시가 많았어요.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인구 공백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한 도시들은 활력을 잃지 않았어요. 그게 관광 산업일 수도 있고, 문화 창조 산업일 수도 있고, 도시마다 조건은 다르겠지만요. 결국 중요한 건 재능의 유동화를 통해 키울 수 있는 부분을 잘 선택해 앞날을 개척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책 후반부에 ‘나를 위한 몰입의 도시’를 이야기하면서 자아를 위한 제4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제4의 공간은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가 1989년에 쓴 책 <제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에서 기원했어요. 제1의 공간은 집, 제2의 공간은 직장인데, 올덴버그는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집이나 일터 외에 카페, 서점, 동네 술집 같은 제3의 공간에서 지역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며 공동체를 형성해요.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고, 집과 직장에서 갇힌 자아가 해방되는 공간이죠. 그런데 도시를 살펴보니 기존 제3의 공간과는 다른 결의 장소가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현상을 목격하고 그것을 ‘제4의 공간’이라 불렀어요. 누구와 커뮤니티를 구성하느냐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활용하면서 나를 단련하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이 중요해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단단함을 추구하고 한 단계 성장해나가는 공간이죠. 이런 수요는 지금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학교나 직장에서 채울 수 없는 욕구, 즉 나를 계발하고 정체성을 발굴하려는 요구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이를 반영하는 공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제4의 공간’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책에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헬스장의 경험을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주에 가면 항상 들르는 탑동이 그런 공간입니다. 아라리오갤러리, 디앤디파트먼트, ABC 베이커리 등이 생기면서 그곳을 혼자 조용히 즐겼고요. 관광지가 아닌 탑동이 명소화된 것은 매우 현대적인 현상이죠. 누군가 탑동을 구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아닌데, 개인들이 각자 분위기를 만들고 자신을 드러내며 함께 호흡하고 교류하면서 자생적으로 모인 거예요. 물론 거점 역할을 하는 아라리오갤러리가 있긴 하지만, 마스터플랜 없이도 이런 동네가 형성되고 사람들을 불러들이며,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제4의 공간에 대한 호응이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이런 공간이 늘어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어요. 북촌의 아파트멘토나 시청의 커뮤니티 HFK는 제각각 성격에 맞게 운영이 잘되고 있죠.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이태원111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9월 말에 준공 후 오픈 준비 중인 이 공간의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나요? 이태원은 여러 언어와 문화, 음식이 어우러진 독특한 매력을 오랫동안 이어온 지역이에요. 굉장히 상업화되고 힙한 분위기지만, 동시에 높이 제한 등 개발이 억제된 덕분에 주거지가 유지되어 왔어요.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이 공존하는 점이 흥미롭고, 경사를 오가는 지형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요. 이번에 조성된 ‘이태원111’은 이태원동 111번지 부지 세 곳을 합쳐 300평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에요. 주거와 근린 생활 시설이 여유롭게 배치되었고, 사무실 공간 옆에는 중정도 마련되어 있어요. 지하에 약 13미터 높이의 대형 공간(전시실)을 만들고 이태원에 어울리는 복합문화적인 성격을 부여했어요. 이태원의 경계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아요.
도시 관측력을 키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요? 나와 조응할 수 있는 공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삶의 자세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어요. 그래서 저는 사냥감을 쫓는 헌터가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광부가 되길 제안하고 싶습니다.

WRITER
전종혁(문화 평론가)
EDITOR
김지선, 박경미
PHOTOGRAPHER
진소연
LOCATION
이태원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