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한국 패션의 얼굴들
새로운 세대의 K-디자이너들이 글로벌 패션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코르셋과 크리놀린을 모티프로 한 로맨틱 무드의 룩.
(왼쪽부터) 김규리 디자이너.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완성한 슈즈.
손끝에서 피어난 로맨티시즘
김규리는 로맨틱한 디자인과 쿠튀르적 디테일을 담은 브랜드 ‘규리킴(Gyouree Kim)’을 전개하고 있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과 왕립예술학교를 거쳐 알렉산더 맥퀸에서 경험을 쌓은 그녀는 동화 같은 컬렉션을 선보인다. 섬세한 수작업이 유난히 눈에 띄어요. 재봉틀로 표현하기 어려운 디테일한 부분은 모두 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마감도 손바느질로 하면 훨씬 깔끔하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예요. 옷을 구상할 때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형태예요. 마음에 드는 소재를 발견하고 ‘이걸로 치마를 만들면 예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작업을 시작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커다랗고 둥근 실루엣의 드레스 같은 형태를 먼저 떠올려요. 그렇게 형태에서 출발해 디자인을 구체화하죠. 한국과 영국, 두 무대에서 작업할 때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사이즈와 노출 정도의 차이. 영국은 다양한 인종과 체형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사이즈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어요. 디자인적으로도 훨씬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었죠. 반면 한국에서는 실용성과 착용감을 고려해 사이즈를 줄이고 좀 더 웨어러블한 방향으로 조율하고 있어요. 그래도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균형을 잡습니다. 옷을 만들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이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균형을 맞추는 일이에요. 작업하면서 어딘가 부족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러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완벽한 이미지를 찾을 때까지 계속 다듬어요. ‘옷을 입는 즐거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자신감을 입는 것.
(왼쪽부터) 김지용 디자이너. 햇빛의 흔적을 담은 ‘선 블리치’ 기법의 의상.
시간과 태양이 스며든 흔적
김지용은 햇빛에 원단을 그을리는 ‘선 블리치(Sun-bleach)’ 기법으로 독보적인 디자인 세계를 구축한 브랜드 ‘지용킴(JiyongKim)’을 이끌고 있다. 루이 비통과 르메르 등 유수의 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2024년 LVMH 프라이즈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선 블리치 기법을 처음 시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독창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었어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공부하던 시절, 졸업 컬렉션으로 선보인 작품이 이렇게 브랜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죠. 자연의 힘으로 옷을 완성한다는 점은 지속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어요. 지속 가능성은 저에게 ‘기능’이 아니라 제 전반에 내재된 사고방식이자 태도예요.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가치를 담은 옷을 만들고 싶어요. 옷을 만드는 긴 과정이 지용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지만, 동시에 제약도 있을 것 같아요. 선 블리치 과정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달까지 이어져요. 날짜와 시간, 햇빛의 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서 계획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짜릿한 순간으로 이어질 때가 있어요. 예상치 못한 결과가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하죠. ‘옷을 입는 즐거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학생 시절부터 오리지널 빈티지 아카이브를 수집하면서 ‘시간이 스민 옷’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을 깨달았어요. 지용킴의 옷도 그 미학을 담고 있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입을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이어진다고 믿어요.
(왼쪽부터) 과감한 실루엣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슈즈. 백지수 디자이너. 실험적인 구조와 소재로 완성한 쿠튀르 룩.
감정과 형태가 빚어낸 실루엣
백지수는 투명한 감각 위에 인체의 구조를 자유로운 실루엣으로 풀어낸 쿠튀르 룩을 선보이고 있다. 2023-24 F/W 파리 쿠튀르 컬렉션에서 ‘지수 백(Jisoo Baik)’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녀는 차세대를 이끌 젊은 쿠튀리에로 주목받고 있다. 오늘날 쿠튀르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되는 쿠튀르는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오늘날 ‘시간이 만든 진정한 럭셔리’를 보여주는 방식이에요. 스케치 대신 마네킹 위에 직접 형태를 구축하는 작업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손으로 직접 형태를 만들 때 옷의 균형과 흐름을 가장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어요. 즉흥적으로 조형을 바꾸며 새로운 실루엣을 발견하는 과정은 제게 가장 중요한 창작의 순간이에요. 이번 컬렉션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취한 배(Le Bateau Ivre)’에서 영감을 받았다고요. 시의 고유한 이미지와 리듬을 시각적으로 해석하고, 언어의 감정선을 실루엣과 소재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자 했죠. 옷이 마치 시처럼 감정을 전달하길 바랐어요. 최근에 강한 영감을 준 예술 작품이나 아카이브가 있나요? 유리 조형과 인체의 관계를 다룬 아트 피스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유리의 유동적인 형태와 빛의 반사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의상의 조형적인 라인과 소재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옷을 입는 즐거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옷은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하는 방식이에요. 단순히 꾸미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어떻게 보여주고 싶은가’를 시각적으로 말하는 예술적 언어죠.
EDITOR
박경미
PHOTOGRAPHER
진소연
COURTESY OF JISOO BA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