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

웰니스 전문가 강로제는 무려 800킬로미터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번의 완주로 모자라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한 친구

폰페라다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 안드레아. 매일 함께 먹고 걷고 자며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여정을 함께했다.

폰페라다의 성벽

순례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 폰페라다는 강이 흐르고 역사를 담은 성벽이 아름답다. 이곳에 도착하려면 악명 높은 구간으로 불리는 엘 비에르조 지역의 산악 지대를 지나야 한다.

800킬로미터, 나를 부르는 길
“너는 왜 이곳에 왔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친구가 물었다. 나는 길 위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 길이 나를 불렀어. 그래서 왔지.”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곳은 수없이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나를 부르는 곳으로 향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단순히 걷고 싶어서, 누군가는 과거를 놓고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 800킬로미터를 걷는 길이 쉽지 않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감만으로도 충분했다. 걷는 동안 나는 매일 새로운 나를 마주했다. 대부분은 불편하고 모난 모습이었다. 이 길 위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고 당장 외면하더라도 또 나를 찾아올 것임에 분명했다. ‘까짓것!’ 마주해보기로 했다. 매일 20킬로미터를 넘게 걸으며 이어간 나와의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점심 메뉴나 어떤 마을에서 머물지 같은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했지만, 곧 ‘무엇을 할 때 내가 웃는가, 어떤 말이 내 마음을 닫게 하고 열리게 하는가’ 같은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 질문과 답이 차곡차곡 쌓이며 나는 매일매일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마음에 들었다. 결국 이 길이 알려주고자 했던 건 단순했다. 내가 곧 사랑이라는 것.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길은 그렇게도 나를 불렀다. 나의 첫 번째 순례길이었다.

순례길의 진짜 선물
“올라! 부엔 까미노!” 아침에 만나는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길을 나섰다. 혼자 걷던 길 위에 이번에는 동행이 생겼다. 나는 그동안 요가와 명상 리트리트, 프리다이빙 투어를 기획하며 웰니스 여행을 이끌어왔다. 여행과 배움의 순간을 ‘혼자만의 경험’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의 버킷 리스트지만 낯선 언어와 긴 일정,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길. 그래서 나는 ‘얼시걸 저니(Earthy Girl Journey)’라는 이름으로 2주간 315킬로미터를 함께 걸을 이들을 모집했다. 나는 꽤나 불편한 여행을 제안했다. 걷는 동안 덜 쓰고, 덜 버리며,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고 했다. 식탁 위에는 늘 채식 옵션이 있었고, 하루의 끝에는 요가와 스트레칭으로 고생한 몸을 풀었다. 우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에 귀 기울이며, 낯선 음식을 맛보고, 다른 문화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갔다. 익숙한 ‘컴퍼트 존’을 깨고 나가자고 제안했고, 그들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스페인 레온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길, 봄을 맞이한 들판에는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더해졌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며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내가 놓친 풍경을 동행이 발견하기도 하고, 그 시선을 따라 새로운 풍경들을 함께 보았다. 같이 걷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이 웃었고, 더 맛있게 먹었으며, 더 오래 기억할 순간들을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 안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작은 빛이 되어 삶을 비추기를 기원했다. 순례길의 진짜 선물은 풍경도, 완주도 아닌 스스로를 믿는 힘이기 때문이다.

순례길의 전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사리아의 한 알베르게 정원에서 디오고와 안드레아에게 요가를 알려줬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도착하는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 생장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순례길에서 만난 특별한 간이 가판대. 주인인 마테오가 디자인한 도장과 순례자가 선택한 실링 왁스로 멋진 스탬프를 찍어준다. 순례길에서 꽤 유명한 스폿이다.
순례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정표. 노란 화살표나 조개 껍질로 방향을 안내한다.

강로제는 웰니스와 여행 경험을 연결하며 ‘얼시걸 리트리트(Earthy Girl Retreat)’를 통해 순례길, 요가, 명상, 프리다이빙 여행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프리다이빙 강사, 요가 안내자, 이벤트 매니저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사람들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순례와 여행을 통해 발견한 내적 성장과 사랑의 경험을 글과 프로그램으로 나누며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실천하고 있다.

에스테야의 풍경

자원봉사를 하며 머물렀던 에스테야. 아늑하고 사랑스러운 골목과 광장이 어우러진, 순례자들의 쉼터다.

마음에 울린 종
딩-딩-딩—. 종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순례길에서 종소리는 평소 배경음처럼 느껴지지만, 그날은 달랐다. 1분, 2분, 대성당의 종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뭔가 특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가까운 상점에 들어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종소리가 계속 울려요.”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는 성당을 향해 달렸다. 활짝 열려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순례자와 여행자, 마을 사람들로 가득했다. 곧 미사가 시작되고 향로가 등장했다. 특별한 날에만 볼 수 있는 거대한 향로가 여섯 수사의 손에 매달려 천천히 움직였다. 대성당 안을 가로지르며 향로의 연기를 흩뿌리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모두 숨조차 멈춘 듯 조용했다. 나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첫 번째 순례길에서 나 자신에게 발견한 사랑, 두 번째 순례길에서 동행들에게 느낀 연대와 따뜻함, 그리고 이곳에서 각자의 길을 무사히 완주한 수많은 순례자의 마음까지.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이 향로의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눈물이 차올랐다. 새 교황님 레오14세의 이름이 울려 퍼지는 동안 내 마음속에도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길 위에서 배운 배려와 사랑이 한 번 더 내 안에 깊이 새겨졌다.

재즈 공연 풍경

에스테야에서 22km 떨어진 푸엔타 라 레이나에서 야외 재즈 공연이 열렸다.

순례길, 계속되는 이야기
순례길은 나를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작은 마을 에스테야(Estella)의 공립 숙박 시설인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로서 다녀왔다. 오늘도 수많은 발걸음이 이곳을 스친다. 에스테야에 머물기를 선택한 순례자들이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나는 작은 간식과 한 잔의 물을 건네기도 하고, 동네의 분위기 좋은 바를 추천하기도 하고, 지나온 여정을 가만히 들어주기도 한다. 일요일과 월요일 저녁, 알베르게에는 ‘기부제 커뮤니티 디너’가 열린다. 닫힌 슈퍼마켓과 레스토랑을 대신해 순례자들에게 파스타, 감자 오믈렛, 과일, 와인을 제공하고 그들이 내는 만큼의 금액을 받는다. 이 시간은 순례자들의 허기를 달래줄 뿐 아니라 서로를 이어준다. 국적과 언어, 나이와 배경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발바닥의 고통, 예기치 못한 소나기,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저녁이 끝나면 각자가 사용한 접시와 자리를 정리하며 짧지만 진했던 공동체는 다시 내일을 향해 흩어진다.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길을 떠난 알베르게에는 고요가 내려앉는다. 남겨진 것은 발자국의 흔적, 새벽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어제의 따뜻한 온기뿐이다. 나도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침대 시트를 갈아 끼우며 봉사자로서의 순례를 시작한다. 쓸고 닦으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누군가의 여정 속에서 잠시 머물 안식처가 되고 길을 밝혀주는 불빛이 되는 일, 바로 순례길이 나를 다시 부른 이유였다. 길 위에서 배운 사랑을 조건 없이 다시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WRITER
강로제(웰니스&리트리트 전문가)
EDITOR
백가경
PHOTOGRAPHER
강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