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책의 마리아주
우리가 여러 책을 겹쳐 읽고, 이어 읽고, 동시에 읽는 이유.
마리아주 아닌 마리아주 독서법
좋은 술은 안주가 필요 없다. 그 자체로 훌륭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책은(작가는) 다른 책을(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깔고 와인 테이스팅에 빗대 독서 마리아주에 대해 이야기해봐도 좋을 듯하다.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이란 게 있다. 같은 생산자가 만든 같은 와인을 1999년, 2005, 2015년의 여러 빈티지별로 비교 시음하는 것이다. 해당 해의 날씨와 흘러간 시간이 와인의 맛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섬세하게 평가하는 방식으로 특히, 그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책도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설가 J. M. 쿳시의 <추락>이 좋았다면(작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의 초기작인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중기작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후기작인 <폴란드인> 등을 이어서 읽는 것이다. 작가의 관심, 관점, 문체 등이 작품마다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며 애정의 크기를 늘리고 줄이는 전작주의자의 독서법이랄까. 좋은 술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음식이 되듯, 애정하는 작가의 책들을 비교 탐독하는 것 역시 일종의 독서 마리아주가 될 수 있다.
품종이 같은(소재가 같은) 와인을(소설을) 생산자를(작가를) 달리해 함께 마시는(읽는) 방식도 있다. 예를 들면, J. M 쿳시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나딘 고디머의 <거짓의 날들>과 비교하며 읽는 것이다. 두 작가 모두 남아공 출신이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두 작품의 주요 소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이다. 그러나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 주인공들의 연령, 시점과 묘사,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 등의 뚜렷한 차이도 존재한다. 이런 차이를 음미하며 읽다 보면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관점을 확장할 수 있다. 여기에 남아공 특파원 출신의 한국인 저자가 쓴 리포트 <남아공 로드>를 더하면 소설적 진실과 사실의 조화까지 가능하다.
위와 같은 방식은 무수한 마리아주가 가능하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순이 삼촌>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스페인 내전을 다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화성을 배경으로 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와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제가 쓴 소설 <화성의 판다>도 있습니다!)를 동시에 읽는 것이다. 장르를 넘나들 수도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프리모 레비의 논픽션 <이것이 인간인가>와 파울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 그리고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은 화가의 삶을 다룬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소설 <샬로테>를 번갈아 읽으며 진실을 드러내는 형식의 다채로움을 경험해보는 것이다.
와인 생산자나 포도 품종 같은 내적 연계성 외에 오리, 캥거루 같은 동물 그림을 사용한 라벨에 이끌려 와인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독서에서도 이를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J. M 쿳시는 노벨문학상과 부커상을 모두 받았는데, 그를 포함해 나딘 고디머, V. S. 나이폴, 가즈오 이시구로, 윌리엄 골딩만이 같은 영예를 안았다. 이 다섯 작가의 책을 함께 읽는 건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00점을 준 와인 다섯 종류를 동시에 마시는 호사나 다름없다. 김기창(소설가)
여러 책을 ‘접목’하는 매력
나의 직업은 작가. “작가님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으세요?”라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그리고 나의 씩씩한 대답은 “그럼요, 많이 읽죠!”. 지금도 저기 책상 한편에 책들이 탑처럼 쌓여 있다. 쌓인 책 중에서 맨 위에 놓인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맨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가장 최근에 읽었다는 뜻이기에. 왜 최근에 읽은 책을 계속 읽지 않느냐고? 나는 식사도 두 끼 연속 같은 메뉴는 먹지 않는 까탈스러운 작가다. 심지어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던데. 아참, 여기서 양식은 칼질하는 그 양식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말할 때의 양식이다.
책탑에서 읽을 책을 한 권 뽑는다. 한 손으로 빼면 무너질 수 있으니 양손을 사용해 조심조심 뽑는다. 물론 책장도 따로 있고 그곳에 더 많은 책이 꽂혀 있지만, 내가 한동안 읽거나 읽을 책들은 책탑에 쌓여 있다. 참여 중인 인터뷰 스터디에서 선정한 책 두 권, 동시대의 대작가가 알려주겠다는 이메일 작성법, 공연을 봤더니 너무 웃겼던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소설집, 처음 이름을 알게 된 소설가의 에세이, 선물로 받은 10만 팔로어의 그림일기까지 다양하다. 오늘은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의 <꽤 낙천적인 아이>를 다시 뽑아 읽었다.
병렬의 책탑. 하나의 장르에서 다른 책을 읽을 때도 있고, 한 사람이 번역한 여러 작가의 책을 읽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같은 작가가 쓴 같은 종류의 책을 연이어 읽는 일은 드물다. 같은 단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힘을 지닌다는 사실, 이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병렬 독서의 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접목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 두 종류의 나무를 접착해 하나의 나무로 만드는 것. 나는 두 종류의 책을 읽으며 접목의 시원함을 누린다. 태초에 나무였을 이 책들, 그 속에 인쇄된 서로 다른 문장이 한 단어로 서로 접착되는 순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첫 줄에서 그다음 줄로. 쓰는 일과 읽는 일의 모양이 언뜻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쓰는 일은 언제나 밀고 나가야 하는 반면, 읽는 일은 필요에 따라 열고 또 닫을 수 있다. 미닫이, 여닫이 회전문. 어떤 독서는 밀어야 하고 어떤 독서는 휑- 하고 닫히고 어떤 독서는 누군가 문을 잡아줄 때도 있듯이, 모든 읽기는 환기될 따름이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좋다는 말은 어쩌면, 생각의 문이 많을수록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괴로울 때 내보낼 방법이 많고 외로울 때 환영할 방법이 많다는.
외출할 때도 책을 두 권씩 챙긴다. 한 권이 시원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외출이기 때문이다. 뭇 타인의 시선에 내가 들 때 나는 세상에서 책 좀 읽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으므로. 읽던 책을 가방에 넣고 또 다른 책을 꺼내는, 일용할 양식이 넉넉해 보이고 싶으므로. 작가보다 애서가처럼 비치는 것이 훨씬 부유해 보이므로. 그러니 독서의 계절 가을에 맞춰 책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아니 솔직히 책 좀 읽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시라. 외출할 때 두 권의 책 챙기기. 생각의 문이 많은 부유한 사람처럼. 일용할 양식들이 넘치는 사람처럼. 책 좀 읽는 사람처럼. 접목의 시원함을 아는 사람처럼. 태재(에세이 작가)
폭식의 즐거움
어떤 음식과 술의 완벽한 조화를 즐기고 있노라면, 이 조합을 처음 공표한 누군가가 궁금해진다. 그는 홀로 있는 저녁 시간, 본능적으로 떠오른 음식과 술을 마구잡이로 입에 욱여넣는 순간 두 맛이 서로를 보완하며 입속에서 춤을 추는 황홀경을 느꼈을까? 나에게 책의 마리아주는 의도하지 않아도 마주하는 광경이다.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읽는 속도를 앞질러 쌓이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산다. 저글링하듯 이 책을 읽다가 묘하게 끌리는 다른 책을 꺼내 읽고, 다른 책이 잊었던 책을 데려온다. 누군가는 정신없어 보일 테지만, 나에겐 일상에 몇 없는 환락이다.
나는 피로에 전 몸을 이끌고 침대에 올라 수면 등을 켜놓고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침대 옆 협탁에는 자기 전 읽기 좋을 책들이 자리한다. ‘몸과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준을 통과한 책들이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킨 책은 마크 하우버의 <새의 시간>과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그리고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이다. 새에 관한 지식이 해박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쓰였지만 언제 봐도 현대적인 시어들이 좋아서, 그냥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열심히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등등 제각각의 이유로 골랐지만 서로 번갈아 읽어도 역시나 잘 어울린다. 슴슴하면서도 깊은 맛의 음식들이 서로를 자극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모양과 비슷하다.
한편, 특수한 상황에 골라서 읽으며 그 어우러짐을 발견할 때도 있다. 나는 시를 좋아하지만 시를 쓰지 못할 때마다 불안과 괴로움을 느낀다. 우습게도 최근 첫 시집 <하이퍼큐비클>을 내고 나서 시 쓰는 법을 까먹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럴 때는 불안을 가속화하기보다 좋아하는 시인의 ‘고군분투’를 담은 책을 편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다. 한국 문단의 야수 같은 여성 시인인 김혜순과 최승자가 각각 펴냈다. 그들의 투지로 시를 써나가는 이야기는 나의 컴컴하고 비천한 생활을 별자리처럼 잇고 비춘다. 김혜순 시인이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은 우리가 아시아인이자, 짐승이자, 끝끝내 여자라는 사실”에 대해 고할 때 최승자 시인은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쓴 산문으로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알려준다. ‘쓰기’의 괴로움을 그보다 더한 광폭함으로 밀고 나갈 때 반드시 <기쁨의 책>처럼 상큼한 장면 전환이 꼭 필요하다. 이는 영양가 높은 스테이크와 함께하는 드라이하고 칠링된 내추럴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안 좋은 생각으로 자신을 불안으로 끌고 가는 나쁜 습관이 있다. 상담가는 내게 매일 아침 감사한 일 세 가지를 떠올리면 증세가 호전될 거라고 했는데, 미국의 시인 로스 게이의 <기쁨의 책>이 내겐 딱 그런 효험을 준다. 그는 기쁨에 대해 한 편의 에세이를 쓸 요량으로 기쁨의 목록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매일 당연한 기쁨이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생기고 우연히 마주한 기쁨에 대해 들려준다. 스티비 원더의 앨범 <더 시크릿 라이프 오브 플랜츠>나 로이 에이어스의 ‘에브리바디 러브스 더 선샤인’ 같은 곡(심지어 나도 이 곡을 좋아해서 시로 쓴 적 있다!), 손 글씨를 쓰는 데 최고라 여기는 펜 등을 소개하며 유쾌하기 그지없는 문체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마지막은 1937년 같은 해 일본에서 태어난 두 인물에 대한, 탐독의 마리아주다. 이는 묵직한 올드 라스푸틴 같은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그보다 묵직한 초코케이크를 함께 먹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그 조합에 열광하면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횟수를 제한하는데, 이 두 작가도 그렇다. 현대미술가이자 소설가이면서 전위예술 단체 ‘하이레드센터’ 회원인 아카세가와 겐페이, 그리고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출신 만화가이자 수필가 쓰게 요시하루다. 겐페이가 쓴 <초예술 토머슨>을 읽으며 쓸모없는 유용한 공간에 대한 미학에 깔깔대며 웃다가 일본의 유명 다인 센노 리큐에 대한 전위적인 다도 책 <침묵의 다도, 무언의 전위>를 곁들이며 말차를 격불해 마신다. 그리고 겐페이와 달리 긴 무명 생활 이후 뒤늦게 작품성을 인정받은 쓰게 요시하루의 유일한 국내 출간 단행본인 <나사와 검은 물>을 읽으면 위에서 아래로 잘 흐르던 뇌의 혈류가 역행한다. 쓸쓸하고 고독한, 기괴한 엉뚱함 속에서 ‘전위예술가’들의 사고가 헬멧처럼 내 머리에 씌어지는 기분이다. 그러면 당 스파이크가 찾아오듯 곧장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튀어 오른다. 그 행위가 진을 쏙 빼놓기 때문에 결코 데일리한 마리아주로는 추천하지 않는다. 백가경(<에비뉴엘> 피처 에디터)
EDITOR
백가경
PHOTOGRAPHER
프랭크 플로레스(Frank Flores on Unsplash), 이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