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벽을 부수는 춤

현대무용가 허성임은 인종, 젠더, 권력, 자본이 쌓은 편견의 벽 앞에서 춤으로 틈을 만든다.

RECTO, REPETTO

프린지 칼라 홀터 넥 드레스는 RECTO. 옥스퍼드 슈즈는 REPETTO.

“너는 키가 작고 예쁘지 않아서 무용수가 될 수 없어.” 고등학생 허성임이 처음으로 무용가의 꿈을 키울 무렵 자주 들었던 말이다. 춤추고 싶다는 열망으로 몸무게의 반 이상을 감량하고, 국내 대학의 무용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것으로 모자라 벨기에의 유명 무용학교 파츠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30대 후반까지 유명 무용단의 훌륭한 안무가들과 함께 세계 무대를 누볐다. 연출가이자 안무가, 희곡작가, 무대연출가 등 전방위로 전복적인 상상력을 보여온 얀 파브르의 2004년 작품 ‘여자가 남자의 주역이었을 때’의 솔로 무용수로 100회 이상 전세계를 종횡무진하며 공연을 펼쳤다. 이 외에도 세드라베 무용단, 알리아스 무용단 등과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고, 2022년에는 국내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 표창장도 받았다.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춤을 보여주고 싶다던 허성임은 고등학생 때 마주한 편견을 가뿐히 뛰어넘고 꿈을 이룬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선택한 작품들은 공통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이런 모습이어야만 해’라는 식의 고정관념을 부수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 이후 40대로 접어들면서 여성으로서, 아시아 동양인으로서,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자로서 편견에 대항하며 직접 작품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안무가로서 대표작은 ‘넛크러셔’로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해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그리고 지금도 전형적인 서사로부터 탈주해 추상적이면서도 반복적인 자신만의 춤의 언어로 동시대의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던지는 중이다. 그중 기후 위기라는 세계적 비상사태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든 작품 ‘1도씨’는 반클리프 아펠이 올해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댄스 리플렉션 페스티벌’에 선정돼 10월 30일과 31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될 예정이다. 예쁜 춤과 아름다운 몸의 선이 단편적인 이차원에 그친다면, 허성임의 몸과 춤은 삼차원의 감각과 무게로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난제를 적극적으로 파고든다. 그런 역동적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허성임을 만나 직접 확인했다. 작은 체구로부터 추동하는 깊이 있는 말과 유쾌한 제스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춤의 언어를 연상케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의 “춤은 영혼의 감춰진 언어”라는 말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창작 집단 ‘허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죠. 이름에서 중의적인 의미가 느껴집니다. 제 성인 ‘허’와 그녀를 뜻하는 영문 ‘Her’의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어요. 여자 안무가에 대한 자긍심을 선언하듯 이름을 짓고 싶었죠. 전 세계 무용수의 90%가 여자인 데 반해 안무가는 남자가 훨씬 더 많거든요. 또 예전부터 저는 바이너리, 논바이너리로 일컫는 성적 정체성이나 인종과 관련한 작업을 꾸준히 해오면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허 프로젝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넛크러셔’가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성에 대한 일반 통념에 정지 버튼을 누르는 작품이죠. 클래식 발레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이 성별에 따라 다른 안무를 수행한다면, 크러셔(Crusher)라는 의미를 더해 무용계에서의 성별 고정관념을 분쇄한다는 주제를 담았어요. 유럽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여성, 특히 동양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늘 따라붙곤 했기에,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어요. ‘넛크러셔’에는 세 명의 여성 무용수가 등장해요. 반짝이는 레깅스 의상을 입은 그들은 처음 30분 동안 뒤돌아서 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고 골반을 튕기며 엉덩이를 움직이죠. 여성의 신체 곡선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움직임은 이내 과격한 헤드뱅잉으로 변주해요.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은 관객에게 ‘이것이 진짜 여성이 맞느냐’라고 질문하며 공고한 사회적 관념을 해체합니다.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 허성임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 허성임은 벨기에의 유명 무용학교인 파츠 안무자 과정을 졸업한 후 얀 파브르, 세드라베 무용단 등 국내외 주요한 아티스트, 창작 집단과 협업하고 있다. 반클리프 아펠은 한국에서 처음 개최하는 댄스 리플렉션에 그녀의 작품 ‘1도씨’를 초청했다.

‘넛크러셔’에 대한 관객의 반응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마지막 부분에서 세 무용수의 몸이 마치 조각난 것처럼 연출하고 싶었어요. 상의를 탈의한 무용수들이 서로에게 위로받는 듯 기대어 있도록 했죠. 또 관객들이 박수를 치고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명확한 엔딩 장치를 넣지 않았어요. 그러자 관객들에게 혼돈스러워했죠. 그 순간이 정말 좋았어요. 한국 관객 중 한 분은 무대 위로 물을 건넸고, 몇몇 무리는 “관객이 나가야 무용수가 쉴 수 있다”며 서둘러 나갔고요. 벨기에에서 한 관객은 나가서 술을 사서 들어와 40분가량 객석에 앉아 있기도 했어요. 나라마다 관객의 차이가 느껴져 재미있었습니다.
신작 ‘1도씨’는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요? 안무가들은 대부분 지원금을 받아서 작품을 만들어요. 그렇기에 예술가로서 보편적인 가치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1도씨’는 기후 위기에 직면한 지금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어요. 지구 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빙하가 녹고, 바다의 수위가 올라가는 등 어마어마한 변화가 생겨요. 우리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행하는 작은 일들이 엄청난 위기를 가져온다는 사실, 특히 각국의 도시에서 행해지는 일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1도씨’의 안무를 기획하면서 중점을 둔 요소는 무엇인가요? 걸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에 따라 기후 위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봐요. 스카이라인 같은 도시의 여러 요소를 걸음으로 패턴화했어요. 한편으로 매연을 뿜는 이동 수단을 타는 대신 걷기의 중요성을 암시하기도 해요. 무용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공연 내내 5000회 이상 걷는 동작이 나와요. 하나씩 숫자를 세어가며 외워야 하기에 그리 녹록지 않은 안무예요.
안무와 무용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둘은 완전히 달라요. 무용은 서로의 동작, 음악, 리듬 등을 피부로 직접 감지하고 반응하는 행위예요. 하지만 안무는 그들을 밖에서 조망하는 행위에 가깝죠. 무용수가 어떤 동작을 할 때 조명이 들어와야 하고 음악은 얼마큼의 크기로 재생돼야 하는지 등 예민한 감각이 필요해요.
안무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듣고 싶어요. 보통 주제를 먼저 정하고 나서 1~2주 정도 연구를 해요. ‘1도씨’를 예로 들면, 걸음이라는 주제를 포착해 그것을 어떤 모양으로 보여주면 좋을지를 연구했죠. 도시에서 자연으로 이동하는 부분에서 무용수들이 빠르게 걷는 모습이 마치 어항이나 바다에서 수영하는 물살이의 모습 같았어요. 그다음에 상체가 뒤로 휘어지는 캉브레라는 자세를 여러 명이 반복하니 마치 용암이 분출하는 장면이 연상됐죠.
계속해서 편견에 도전하는 창작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저 역시 아이가 있기에 제법 바쁜 일상을 보내긴 하지만, 한국에서보다는 시간이 많은 편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한국에선 볼 것도 즐길 것도 너무나 넘쳐나서 지루할 틈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 무언가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고 창의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EDITOR
백가경
PHOTOGRAPHER
이재안
FASHION EDITOR
박경미
HAIR&MAKEUP
배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