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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렌지색 휴가

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와인을 더 풍부하게 즐기기 위한 혁신적인 양조 방식에서 탄생했다. 이탈리아 콜리오 지역에서 오렌지 와인의 선구자들을 만났다.

콜리오지역

언덕이라는 뜻의 콜리오 지역은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지대에 있다. 슬로베니아의 ‘브르다(역시 언덕이라는 뜻)’와 같은 곳이다.

리볼라 지알라 품종

껍질이 두꺼운 리볼라 지알라 품종은 신이 오렌지 와인을 만들라고 내려준 게 분명하다.

프리모식 와이너리의 모험
“내일 자전거 경주가 있어서 와이너리로 오는 길이 폐쇄된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어요. 약속된 시간에 당신이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주의 콜리오(Collio) 지역에 있는 프리모식(Primosic) 와이너리에서 보내온 메일은, 자전거 경주 대회 주최 측을 증오하기에 충분했다. ‘뭔 놈의 대단한 경기를 하길래….’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가볼게요”라고 답을 하려는 찰나, 자전거 경주 관계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면죄부 메일이 도착했다. “길이 15분 단위로 폐쇄됐다가 열린다고 하네요. 좀 기다리긴 해야겠지만 올 수는 있을 거예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증오했다가 용서하는 호들갑을 떨면서 프리모식 와이너리에 어떻게든 가려고 기를 쓴 건, 내가 알코올중독자라서가 아니다. 이 모든 건 책 <앰버 레볼루션> 때문이다. 사이먼 J 울프가 쓴 <앰버 레볼루션>은 화이트 와인 포도 품종을 껍질과 함께 침용(스킨 콘택트)시켜 만드는 ‘오렌지 와인’에 대한 안내서, 라기보다는 1990년대에 오렌지 와인을 시도한 선구자들에 대한 안내서에 가깝다. 그들의 모험심과 통찰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내추럴 와인이나 오렌지 와인을 마실 때 더 이상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 하지는 않게 됐다. 음주의 패러다임을 바꾼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 몇 번이나 우회한 끝에 도착한 프리모식 와이너리는 시원하게 펼쳐진 포도원과 함께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이었다. 프리모식 와이너리의 상징과도 같은 실반 프리모식(Silvan Primosic)이 집 앞 정원 의자에 앉아 손짓해줬다. 현재 프리모식 와이너리는 실반 프리모식의 두 아들 마르코와 보리스가 운영하고, 마르코의 아들 니콜라가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니콜라의 설명에 따르면 콜리오와 오슬라비아(Oslavia) 지역은 이렇다. “콜리오가 화이트 와인의 본고장이라면, 오슬라비아는 침용 와인의 발상지죠. 오슬라비아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테루아를 자랑해요.”

프리모식 사람들

리볼라 지알라를 수확하는 프리모식 사람들. 1990년대부터 이렇게나 맛있는 와인을 우리 모르게 마시고 있었다.

프리모식의 오렌지 와인

더 많이 못 사와서 아쉬운 프리모식의 오렌지 와인들.

프리모식 와이너리 형제들

프리모식 와이너리를 이끄는 형제, 마르코와 보리스. 지역 토착 품종 리볼라 지알라를 알린 주역이다.

와인 생산자들이 오슬라비아 땅을 사랑하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포도원이 해발 180~200미터에 위치해 있어 햇볕이 충분한 데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보라(Bora)’ 바람 덕분에 포도송이 주변의 공기 순환이 원활해 곰팡이가 필 걱정도 없다. 낮과 밤의 기온차를 만들어내는 보라 바람은 포도의 향을 풍부하게 하고 산도의 균형을 맞춰준다. 이 지역 특유의 폰카(Ponca) 토양 역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면 섭섭하다. 이회토와 사암층이 포도나무의 가장 깊은 뿌리까지 수분을 유지해 가뭄에도 끄떡없고, 풍부한 미네랄 퇴적물은 와인의 미네랄 함량과 염도에 기여한다. 우리는 토착 품종인 리볼라 지알라와 프리울라노로 만든 화이트 와인 2종, 껍질 침용을 하지 않아 다소 가볍고 깔끔한 맛의 와인부터 시음했다. 리볼라 지알라로 만든 ‘싱크 옐로(Think Yellow)’는 실반이 애정을 가지고 만든 와인으로 품종 특유의 원초적인 맛이 살아 있다. 프리모식 사람들은 이 와인을 마르코의 생일이 있는 더운 8월에 회와 함께 마신다고 한다.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맛있는 걸 마시고 있었다니. 배신감은 화이트 와인이 당한 박해의 역사 앞에서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전통적으로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에 비해 저평가되어왔죠.” 잘 들어라, 화이트 와인을 핍박한 레드 와인 추종자들이여. 콜리오는 화이트 와인이 얼마나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맛을 낼 수 있는지 알린 성지다.
성지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오렌지 와인을 맛보는 순간이다. “이 와인들은 껍질과 침용해 아로마가 폭발하면서도 우아하죠. 구조감도 확실하고요.” 이 설명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마시자마자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리볼라 지알라 품종으로 만든 ‘리볼라 지알라 리제르바(Ribolla Gialla Riserva)’와 리볼라 지알라, 피노 그리지오, 말바지아 이스트리아나를 블렌딩해 만든 ‘스킨 세탄타(Skin Settanta)’였다. 하느님 아버지, 도대체 제가 지금 뭘 마신 겁니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되고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누구나 얼간이가 된다. 머나먼 타지에서 바보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와버렸다. 리볼라 지알라 리제르바는 쨍한 오렌지색만큼이나 과일 향과 미네랄 풍미가 넘쳐흘렀다. “우리는 이 와인을 ‘리볼라 디 오슬라비아’라고도 부릅니다. 포도 품종과 양조 방식을 오슬라비아 마을과 연관시키기 위해서예요.” 기분 좋은 꽃향이 적당한 산미와 부드러운 타닌감과 균형을 이루는 스킨 세탄타는 암포라에서 70일간 껍질과 함께 침용해 만든다. 인간의 개입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땅의 개성을 재현하는 것, 그게 바로 내추럴 와인의 본질이니까.
프리모식 와이너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닌 이상, 맛의 비밀은 리볼라 지알라에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에게 굉장히 특별한 품종입니다. 오랫동안 ‘신데렐라’ 포도였죠.” 즙이 많은 과육과 두꺼운 황금빛 껍질을 가진 리볼라 지알라는 사실 지역의 아픈 역사와도 연결돼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이곳에서 농부들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리볼라 지알라를 다시 심었다. 실반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부모님이 시장에서 사 주신 작은 낫을 들고 포도를 수확하러 갔어요. 가장 즐겁게 기다린 포도가 바로 리볼라 지알라였어요. 크고 맛있었으니까요.” 1998년 껍질 침용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 포도 품종의 맛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침을 고이게 하는 맛있는 화이트 와인과 오렌지 와인 중 단 몇 병만을 골라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캐리어 무게 제한만 아니었다면 세관에서 밀수업자 의심을 받을 만큼 양손 가득하게 샀을 것이다.

라디콘 포도원

라디콘의 포도원 중 일부는 슬로베니아에 있어 하루에 몇 번이나 국경을 넘나들기도 한다.

라디콘 와이너리의 혁신
프리모식에서 950미터 떨어져 있는 라디콘(Radikon) 와이너리를 방문하자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지대에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여기는 이탈리아 땅이고 저기는 슬로베니아 땅이에요.” 우리를 맞아준 이바나 라디콘(Ivana Radikon)은 자신의 포도원 중 슬로베니아 쪽을 가리켰다. 콜리오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유고슬라비아에서 자라다가 갑자기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인이 됐다. “유고슬라비아가 아직 존재하고 슬로베니아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지 않았을 때는 국경 반대편의 포도원을 돌보는 게 훨씬 복잡했어요.” 이렇게 풍요롭고 평화로운 지역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자비한 폭격에 노출돼 폐허가 됐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라디콘 사람들은 알프스산맥으로 이주해야 했고, 무솔리니 시대에는 슬로베니아어를 쓰는 것조차 억압당했다. 1980년대 전까지 라디콘 가족들은 가축을 기르고 과일을 재배하고 소량의 와인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슬로베니아의 아름다운 유산은 바비큐를 할 때 피오렌티나 스테이크와 함께 발칸반도의 매콤한 소시지인 체바프치치를 먹는 습관 말고도 남아 있었다. 신이 놓고 간 듯한 리볼라 지알라 품종, 그리고 화이트 와인을 레드 와인처럼 스킨 콘택트 방식으로 만드는 전통 말이다. “리볼라 지알라는 열매가 크고 껍질이 무척 두껍고 바삭하죠.” 이바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폐허 속에서 리볼라 지알라 포도나무만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들려줬다. 하지만 진정한 전설은 그의 아버지 스탄코 라디콘(Stanko Radikon)이 만들었다. 과거 이 지역에서 화이트 와인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껍질과 짧은 침용을 했다는 점에 착안해, 스탄코는 스킨 콘택트 실험을 지속했다. 처음에는 일주일, 그리고 점점 시간을 늘려 9개월까지 침용했다. 가장 이상적인 기간은 2~4개월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현재 라디콘의 모든 와인은 스킨 콘택트 방식으로 만들어져 깊고 풍부한 맛을 낸다. 스탄코 라디콘이 오렌지 와인의 선구자이자 혁명가로 추앙받는 이유다.
시음회 장소 한쪽에 놓여 있는 책에 스탄코 라디콘의 얼굴이 보였다. “네, 저희 아버지죠.”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바나가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병입 직전의 와인을 조금씩 맛보게 해준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고 한다. “와인을 마신 뒤에 제가 한 표현은 ‘좋아요’ ‘싫어요’ ‘너무 써요’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제 말을 정말 잘 들어줬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비전에 열려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이바나도 와인을 만들게 됐다. 라디콘의 저장고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만드는 블루 라인, 오빠 사샤의 S 라인, 그리고 이바나의 POP 라인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을 강한 힘으로 연결해준 포도원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블루 라인 4종(‘2004 리볼라 지알라(Ribolla Gialla)’, 프리울라노로 만드는 ‘2020 야콧(Jakot)’, 샤르도네와 쇼비뇽 블랑, 피노 그리지오를 블렌딩한 ‘2020 O......’, ‘2020 리볼라(Ribolla)’)과 S 라인 2종(샤르도네와 프리울라노를 블렌딩한 ‘2023 슬라트니크(Slatnik)’, 피노 그리지오로 만든 ‘2023 시비(Sivi)’)을 천천히 시음했다. 블루 라인의 오렌지 와인들은 스킨 콘택트와 숙성을 오래 해서인지 일반적인 상상과 예측을 빗나갈 만큼 더 깊고 복합적인 풍미를 지니고 있었고, S 라인은 지금 당장 몇 병이라도 마실 수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맛있게 느껴졌다. 스탄코 라디콘이 11년 전에 만든 2004 리볼라 지알라를 마셨을 때는 내 아버지가 만든 것도 아닌데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블루 라인을 마시려면 진득함이 좀 필요하긴 하다. 출시되기까지 최소 5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블루 라인은 출시 후 15년간 최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우린 스킨 콘택트를 처음 시도한 1997년의 와인도 여전히 마시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와인 저장고를 방문했을 때 1990년대에 만든 피노 그리지오, 샤르도네 등을 보고 이바나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훔쳐 오고 싶었다.

라디콘의 셀러

오랜 기간 스킨 콘택트와 숙성이 이뤄지는 라디콘의 셀러.

펀치다운

아무리 바빠도 위로 올라온 포도 껍질을 포도즙 속으로 다시 밀어넣는 ‘펀치 다운’ 작업을 하루에 세 번씩 해줘야 한다.

시음와인들

라디콘 와이너리에서 시음한 블루 라인과 S 라인 와인.

야후 메일이 등장한 1997년에 오렌지 와인을 처음 만들었으니 당시 얼마나 공격을 받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렌지 와인은 어딘가 결함이 있다는 편견은 아이폰이 출시되고 트위터, 페이스북이 등장한 2009년까지도 이어졌다. 2009년에 시작된 사샤의 S 라인은 전통적인 화이트 와인과 오렌지 와인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스킨 콘택트를 ‘며칠로’ 짧게 줄였다. “당시 비가 많이 내려 2023 시비는 신선하고 마시기 쉬운 스타일이에요. 2020 리볼라는 짭조름하면서도 강렬한 산미가 있어 좋아하고요.” 테이스팅을 하라고 준 와인 한 방울조차 버리기 아까워 너무 많이 마셨더니 어떤 와인에서 향신료 향이 강하게 났는지, 살구 맛이 났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듯한 이바나 덕분에 맛을 상기할 수 있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 재미있는 전통이 있어요. 다양한 산지와 생산자의 와인으로 가득 찬 커다란 셀러가 있어요. 한 사람이 셀러에서 와인을 고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어떤 와인인지 알아맞혀야 합니다.” 못 맞혔을 경우 벌칙이 와인 마시기, 라면 나도 기꺼이 참가할 의향이 있는데 말이다.
비록 그날 이바나의 POP 라인은 시음하지 못했지만, 그는 저렴하고 심플하면서도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POP 라인을 구상하게 된 건 포도원에서 500미터 떨어진 슬로베니아의 새로운 포도원을 매입하면서다. “거기엔 저희가 평소 블렌딩에 사용하지 않는 품종들이 있었어요.” 새로운 흐름은 때로 이런 우연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밤낮없이 러닝을 하고 영양제를 한 움큼 챙겨 먹으며 술을 덜 마시는 젊은 세대들을 위한 와인일 수도 있겠다. “요즘 사람들은 술을 안 마셔요. 말도 안 돼요”라는 이바나의 투덜거림에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오직 우리만 마시죠.” 지금껏 맛본 가장 개성 넘치고 우아한 와인이라는 사실 외에도 황폐해진 터전 위에서 땅과 포도에 대한 존경심 하나로 반짝이는 오렌지색 예술을 만들어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코올을 멀리할 수 있는 근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면, 미안하지만 나와 친구가 되기는 힘들 듯하다. 5분 만에 가뿐하게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의 슈추레크(Ščurek)와이너리에 체크인을 하자 목을 축이라며 웰컴 드링크로 로제 와인을 준다. 방에 들어서니 냉장고에는 언제든 꺼내 마실 수 있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있다. 콜리오와 마찬가지로 브르다 지역도 한 집 건너 한 집이 와이너리다. 리볼라 지알라는 슬로베니아에서는 ‘레불라(Rebula)’로 불린다고 한다. 친구야, 잠시만… 난 좀 더 있어야겠는데, 너 먼저 한국으로 들어갈래?

WRITER
나지언(칼럼니스트)
EDITOR
김지선
Photo
Courtesy of Primosic Winery, Radikon Win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