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부채의 미학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다. 기술과 예술, 일상생활의 희비가 응축된 부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섬유공예 작가 박정연이 직접 염색한 원단으로 만든 메르(Mer)의 부채. 석류꽃, 맨드라미, 양귀비 등 자연물의 형태와 색채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손잡이에는 실제 나뭇가지를 사용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김동식 장인은 전주에서 4대째 합죽선을 제작하고 있다. 40개의 대나무 살로 우아한 구조를 만들고, 부귀영화의 상징인 박쥐와 매화 문양을 새긴 김동식의 백색 합죽선.
활기찬 스트라이프 패턴이 돋보이는 프라다(Prada)의 아이코닉한 부채. 가죽 스트랩이 더해져 손목에 걸어 휴대하기 좋다.
죽호바람은 지리산에서 대나무 숲을 가꾸며 전통 부채 제작을 이어가는 부채 공방이다. 모시 소재 특유의 자연스러운 질감과 색감, 독특한 형태가 돋보이는 죽호바람의 모시 듸림선.
1910년대부터 단선 부채 생산자들이 모여 살던 전북 남원시 조산동에서 50여 년간 수작업으로 부채를 제작해온 남원 최수봉 부채. 롯데백화점 편집숍 시시호시와 툴프레스가 협업한 오른쪽 부채는 롯데백화점 내 시시호시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우아함과 품위를 잃어버리기 쉬운 여름날, 손바닥만 한 부채를 펼쳐 천천히 바람을 일으키다 보면 조금 더 단정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든다. 부채는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태도와 기분을 얼마간 바꾸어놓는 물건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뜨거운 실외에서 ‘손풍기’를 꺼낼 때와 부채를 펼칠 때의 표정이나 손끝의 뉘앙스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부채를 천천히 부치며 뜨거운 녹차를 식히거나 더위에 뒤척이는 아이에게 작은 바람을 만들어주는 시간은 그 자체로 평화롭고 온순한 기억이 된다.
본래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이집트에서 최초로 발견된 타조 깃털로 만든 부채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고, 그리스 시대에 신전을 지키는 사제들은 부채를 흔들어 신성한 공간의 공기를 환기했으며, 로마 귀족들은 화려한 깃털이나 상아, 금, 은으로 만든 부채를 들고 다니며 부를 과시했다. 18세기 유럽에서 부채는 무도회장에서 내밀한 대화를 주고받게 해주는 비밀스러운 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루이 15세 시절 프랑스 사교계에서 유행했다는 ‘부채 언어(Fan Language)’도 흥미롭다. 20세기 초반에 출판된 부채에 관한 책 <History of the Fan>을 쓴 삽화가 조지 울리스크로프트 리드(George Woolliscroft Rhead)에 따르면 당시 부채를 오른손에 들고 얼굴 앞에 대는 행위는 ‘날 따라와요’, 왼손에 들면 ‘당신을 알고 싶어요’, 부채 끝을 입술에 대면 ‘비밀을 지키세요’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처럼 미묘한 언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부채 언어를 익혀 유창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저자는 부채를 ‘여성의 무기(Woman’s Weapon)’라고 표현했는데, 여성의 발언권이 제한적이던 시대에 부채는 말 그대로 여성이 손에 쥘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였던 셈이다. 1827년에 창립된 파리의 부채 공방으로 현재까지 수작업 방식으로 부채를 제작하는 브랜드 뒤벨르루아(Duvelleroy)는 이러한 부채 언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부채 언어에 대한 기록과 문헌을 보존하고, 부채를 구입하면 ‘부채 언어’를 적은 작은 카드나 소책자를 함께 제공하기도 한다. 얼마 전 반 클리프 아펠은 뒤벨르루아와 함께 프랑스 아티스트 알렉상드르 뱅자맹 나베(Alexandre Benjamin Navet)의 그림이 담긴 아름다운 부채를 제작하기도 했다. 부채에 깃든 문화와 낭만을 이어가려는 이들의 시도가 귀하게 느껴진다.
흔히 부채라 하면 떠올리는 접이식 부채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만큼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양에서 부채의 역사는 훨씬 더 깊고 다채롭다. 한국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부채가 존재했지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문화와 예술의 한 축으로 발전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부채 위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선면화(扇面畵)가 유행했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혜원 신윤복의 인물화 등 수많은 작품이 부채 위에 펼쳐졌다. 부채 그림을 연구해온 미술사 연구자 이인숙은 <선면화의 세계>에서 “부채 그림은 우러러 모시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아끼며 자연스럽게 활용한 예술이다. 부채 그림만큼 소유자와 친밀하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지고, 대화의 주제가 되는 그림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 부채는 가장 간편하게 펼칠 수 있는 화폭이자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예술 작품이며, 아름다운 것을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인스타그램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부채가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고 일상의 공예품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다채로운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에는 부채 만들기 좋은 닥나무 한지가 있었고, 결이 잘 쪼개지고 질긴 대나무가 있어 견고하면서도 가볍고, 우아한 부채를 만들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비단이나 깃털로 선면을 만들고 테두리에 레이스를 장식한 서양의 호화스러운 전통 부채보다 천연의 재료를 사용하며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선을 살린 한국의 전통 부채의 미감에 더욱 끌린다. 한국 전통 부채의 형태는 크게 단선(單扇)과 접선(折扇)으로 나뉜다. 단선은 부채 자루에 둥글거나 네모난 선면이 더해진 형태의 부채로 ‘방구 부채’라고도 불린다. 화면이 매끈하고 평평해 서예나 문인화와 잘 어울리며 한 폭의 정적인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접선 부채에 비해 만들기 쉽고 단순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크고 둥근 부채를 가리키는 대원선, 태극 문양을 담은 태극선, 연잎과 같은 형태의 연엽선, 부채살을 구부려서 멋을 살린 곡두선 등 여러 형태로 조형미를 살린 단선 부채들을 구경하다 보면 소박함 속에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구현해내는 정성 어린 태도에 감탄하게 된다.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접선 부채에는 정교한 부채 제작 기술의 정점이 담겨 있다. 접선 부채가 처음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학문의 습득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서생들이 문장을 외우거나 승려들이 불경을 외울 때 얇은 죽판에 글을 적어 원통형의 통에 넣어두었는데, 이를 한꺼번에 뽑아서 밑을 모아 쥐고 위는 글자가 보이도록 넓게 펴서 공부를 하다가 접이식 부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접선 부채의 대표격인 합죽선은 얇게 깎은 대나무 살 사이를 한지로 감싸 이어 붙인 정교하고 섬세한 부채다. 사방으로 퍼지는 주름의 리듬이 우아하고, 부채살이 펴질 때마다 빛과 그림자에 따라 음영이 만들어지는 구조다. 부채 자체의 조형미가 무척 아름다울 뿐 아니라 부채를 쥔 사람의 손동작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또한 접선 부채는 과거에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만큼, 햇볕을 가려주는 양산처럼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부채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사실 나에게 부채와 관련한 원천 기억은 판촉용 부채다. 원형 플라스틱 뼈대에 새로 오픈한 식당이나 병원 정보를 담은 종이를 붙여 만든 부채 말이다.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거리에서 받은 부채를 소중하게 보관했고, 가족 수대로 선풍기가 돌아가지 않던 시절 내가 잠들기 전까지 천천히 부채질을 해주었다. 요즘도 지하철 앞에서 판촉용 부채를 받을 때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은 무서운 속도로 뜨거워지고 있으니, 이러한 종류의 추억은 머지않아 구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안쓰러운 미래인들은 그저 박물관에서 마주한 부채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그 다채로운 조형미를 탐구하게 될 것이다.
EDITOR
KIM JISEON, PARK KYUNGMI
Photographer
HWANG BYUNGMOON
ASSISTANT
박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