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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인간

의사이자 러너인 정세희 교수가 20년 동안 달려온 이유.

정세희 교수 사진

드레이프 울 실크 톱 COS, 더블 플리츠 와이드 팬츠 RECTO, 스틸레토 펌프스 REPETTO.

뇌를 치료하는 재활의학과 의사로 일하는 정세희 교수는 성실한 러너이기도 하다. 그는 전공의 2년차이던 2003년 4월 5일 처음으로 달리기 대회에 나간 것을 계기로 20년 넘게 달리고 있다. 정세희 교수가 달려온 20여 년의 시간은 뇌를 연구해온 기간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일과 달리기,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로 흐르고 있다. 뇌는 머리를 쓴다고 좋아지지 않으며, 오히려 몸을 써야 건강해진다. 또한 뇌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가 직결된 장기다. 의사로서 무수한 임상 경험을 하며 뇌 건강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목도한 정세희 교수는 진료실 안팎에서 열정적으로 달리기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사람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급한 불을 끄듯 약이나 좋은 음식을 찾지만, 결국 오랫동안 꾸준히 한발 한발 내딛는 노력과 시간만이 우리를 건강한 삶으로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정세희 교수는 저서 <길 위의 뇌>에서 인류의 역사와 달리기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600만여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 중 물질적 풍요를 누린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는 극히 이질적인 찰나이며, 아직 우리의 몸에 진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현재의 우리 몸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은 수렵채집 시대인데, 그때 인간은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매일 6km 이상 걸었다. 또한 ‘오래 달리기’라는 유일한 무기로 죽은 동물을 챙겨 냉혹한 생태계의 틈새시장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실 하루에 9~15km를 걷거나 뛰고 고칼로리 음식은 아주 가끔씩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최소 100만 년 이상을 달렸던 기억이 유전자와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살도록 설계되었다. 이 말은 곧 설계된 대로 살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다.” 이쯤 되면 정신이 번쩍 들며 달려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우리는 달릴 운명인 것이다.

신발 끈 묶는 사진 달리는 정세희 교수 사진

매일 같은 장소를 달려도 야외 달리기는 변화무쌍한 감흥을 전한다. 달리는 정세희 교수의 모습.

오늘 일정이 무척 빠듯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전에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촬영하고 오셨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일에 대한 부담은 없는 편인가요? 그냥 재밌게 이야기하고 왔어요. 병원에서 환자들과 계속 대화해야 하고, 진료하는 환자들이 대부분 고령층이기에 같은 말을 더 쉽게, 천천히 설명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레 말하는 연습이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새벽에도 달리기를 했다고요. 저를 비롯해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적 핑계가 ‘시간이 없다’인데 빼곡한 일정에도 달리기 루틴을 지킬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오늘은 새벽 5시부터 달렸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감각이 좋아서 주로 아침 달리기를 하고 있어요. 달리는 사람만이 느끼는 성취라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아침에 한 시간 반을 달리고 출근을 해요.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제가 달렸는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한 사람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시간이 있었던 거예요. 아침에 상쾌하게 달리고, 낯설고 아름다운 새소리도 들었고, 샤워하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건 내가 이룬 거고, 내 안에 쌓인 거예요. 억지로 일어나서 힘겹게 하루를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충분히 하고 나서 출근한 거죠. 그러고 나면 어떤 스트레스를 받든 흔들리지 않아요. 마음속에 든든한 ‘예비 에너지’ 같은 것이 생기는 거예요. 이처럼 오직 나만 아는 확실한 축적의 감각을 느끼면 계속해서 달릴 수 있어요.
<길 위의 뇌> 역시 ‘달려야 한다’가 책무감이 아니라 ‘달리고 싶다’는 자유의지를 건드리는 책입니다. 글 쓰기의 공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 그것 또한 달리기의 힘인 것 같아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인데, 달리기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죠. 그러니까 하루에 한 시간씩 달리면 하루에 한 시간은 생각할 시간이 생기는 셈이에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을 글이나 말, 그림으로 풀게 되기도 하고요. 달리기에 관한 책 중에서는 미국의 내과 의사 조지 쉬언이 쓴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무척 좋아해요. 제가 평소에 생각해왔던 것처럼 달리기가 단순히 몸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치유나 삶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이라 무척 와 닿았어요.
달리는 시간이 곧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트레드밀 위에서 달릴 때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보거나 듣다 보니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야외 달리기와 실내 달리기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의 경우 트레드밀 위에서는 억지로 달리는 기분이 들어요. 제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 고양되는 기분이나 자유로운 감정, 심리적 안정감과 성취감의 상당 부분은 달리는 상황과 맥락에서 비롯되는데, 이것들이 트레드밀 러닝에서는 모두 사라지거든요. 야외에서는 일단 녹색을 보는 것도 좋고 날씨나 계절, 공기, 햇빛 같은 것을 통해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자체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자연에서의 달리기와 인공적인 환경에서의 달리기는 정신 건강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근거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 경험상 즐거움의 깊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길 위의 뇌> 내용 중 유일하게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어요. “달리는 계절로서의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은 러너들에게 너그러움을 베푼다”는 부분이에요.(웃음) 여름 달리기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햇빛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식물도 아닌데, 햇빛이 없으면 사그라들어서 겨울이 되면 에너지가 뚝 떨어지고 의욕도 사라지거든요. 물론 여름 한낮에는 너무 더워서 달릴 수 없지만, 여름 밤이나 새벽의 공기는 정말 특별해요. 새벽 4시쯤 달리면 바람이 아주 선선하고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우중주, 비 오는 날의 달리기는 완전히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에요. 작년에 집중호우가 내리던 날 달린 적이 있는데, 온몸이 비에 젖고 발밑에선 첨벙첨벙 소리가 나고, 빗소리는 마치 증폭된 것처럼 크게 들렸어요. 그런데 막상 옷이 젖고 나면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해방감을 즐기게 돼요. 이것 역시 여름에만 할 수 있는 경험이죠.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러닝 스폿은 어디인가요? 평소에는 오늘처럼 집 근처 천변을 뛰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남산이에요. 요즘 남산은 러너들 사이에서 유명지다 보니 떠들썩해졌지만 예전엔 정말 사색하면서 달리기에 좋은 곳이었죠. 숲도 우거져 있고, 새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그늘도 이어져 있어서 여름철처럼 더운 날이나 비 오는 날 달리기에도 아주 좋은 환경이에요. 그리고 남산 코스 자체가 훈련하기에 참 좋아요. 건강한 성인은 몸의 무게를 들어올려 부하를 견뎌야 심폐 기능이든 근력이든 의미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데, 남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기 때문에 좀 더 강도 있는 훈련을 할 수 있어요.
책과 강연을 통해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진료 중에 환자들에게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매일 나가서 두 시간씩 걷다 와요”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잘하셨어요”라고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해요. 달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면 컴포트 존(Comfort Zone), 즉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영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컴포트 존은 유지되지 않고 줄어들어요. 계속 걷기만 하다 보면 나중에는 걷기조차 힘들어지는 시기가 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으로 자신의 컴포트 존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운동은 컴포트 존을 넓힐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죠. 꾸준히 달리다 보면 심지어 80대에도 달리는 일이 어렵지 않게 느껴질 수 있어요. 환자를 보다 보면 60대인데 80대처럼 느껴지는 분도 있고, 반대로 80대인데 60대처럼 활기차게 사시는 분도 있어요. 결국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어떤 식으로 살았느냐, 그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거죠. “내 나이에 그건 무리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정말 그 나이에 멈춰버리는 것 같아요.

정세희 교수와 <길 위의 뇌> 책 사진

러너로서의 시간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달리기에 대한 통찰이 담긴 책 <길 위의 뇌>.

‘운동 저축’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달리기는 마치 돈을 모으는 것처럼 꾸준히 오래 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고요. 그런데 달리기는 정말 나이와 무관한가요? 이를테면 70대에 접어든 부모님에게 <길 위의 뇌>를 선물해도 될지, 달리기를 시작하기 좋은 나이는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70대 후반인데 작년에 제 책을 읽고 달리기를 시작하셨어요. 그 시점이 겨울이라 저 역시 몸에 부담이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지금까지 달리고 계세요. 몸이 건강하다면 어느 나이든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기 가장 좋은 나이는 40대라고 생각해요. 20~30대는 인생을 즐기는 시기라면 40세부터는 자신의 몸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걸어 다니고, 계단도 오르고, 일상생활도 문제 없이 할 때죠. 그러나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의 심폐 체력 수준이 20년 후의 뇌 건강을 좌우합니다. 그때 가서 뇌 건강을 챙기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죠. 늦지 않게 자기 인식의 계기를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내 몸의 성능과 한계를 테스트해보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해요. 건강에서 정말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심폐 체력이에요.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심장이 한 번에 짜낼 수 있는 피의 양, 즉 ‘심박출량’이거든요. 심박출량을 키우려면 고강도 운동을 해야 해요.
달리기의 이상적인 강도와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흔히 운동 강도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면 저강도, 노래는 부르지 못해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정도면 중간 강도,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를 고강도로 나눠요. 저는 하루에 1시간 달리는 게 루틴이에요. 1시간을 못 채우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고, 넘기면 ‘오늘 운동 잘했네’ 싶죠. 그건 제 습관일 뿐이고, 모든 사람이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운동은 무조건 하는 게 중요해요. 5분이든 10분이든 안 하는 것보단 100배 낫습니다. 공식적인 운동 권고안은 중간 강도 운동을 일주일에 150분 하라는 거예요. 하루 30분씩 주 5회 운동하라는 뜻이죠.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겐 어쨌든 ‘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해요.
최근엔 저강도 지속 유산소 운동인 ‘존 2 운동(Zone 2 Training)’이 주목받으며 달릴 때 심박수를 체크하는 사람이 늘었어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전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스마트워치를 차고 달리지 않았어요. 마라톤 대회에 나가도 출발선에서 5km 지난 지점에 표지판을 세워두는 식이었어요. 그 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30분이 걸렸으면 아, 내가 1km당 6분 정도의 페이스로 뛰고 있구나를 그때에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지금은 심박수는 물론이고 보폭, 케이던스, 신발 쿠션 반응까지 굉장히 많은 데이터가 나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수치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 데이터들이 유용하긴 한데, 문제는 그 숫자만 본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존 2 훈련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심박수를 기준으로 본인의 존 2 구간 안에서만 뛰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요. 그런데 운동 초보자들은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심박수가 확 올라가잖아요. 그래서 멈추고, 걷고, 다시 뛰다가 또 멈추다 보면 자신의 존 2 구간이 어디인지 정의하기 어려워져요. 사실 존 2라는 건 운동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서 정의될 수 있고, 운동부하검사를 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어요. 그런 검사를 받지 않은 상황에서 단지 심박수를 기준으로 존 2 구간을 추측하면 사람마다 편차가 커요. 또 존 2 구간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달리기가 어려워져요. 그러니까 이런 수치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달릴 것을 권하고 싶어요.
진료실에서 ‘운동’을 처방하고, 올바른 동작을 알려주기 위해 직접 운동 시연까지 하고 있다고요. 국내 의료 환경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외래에서 운동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통 의사는 약을 잘 써야 치료를 잘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다루는 질환에서는 약이 별로 도움이 안 돼요. 혈당이나 혈압 수치는 약으로 낮출 수 있지만, 그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신체 메커니즘을 만들지 않으면 결국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환자들에게 운동을 처방하면 보통 싫어하시죠.(웃음) 의사가 약으로 해결해주면 되지 왜 자꾸 나한테 무언가를 하라고 시키냐고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아요. 재활의학은 환자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나은 방향의 삶으로 안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정세희 교수가 받은 메달 사진

정세희 교수가 보스턴, 시카고,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메달.

대기 환자들의 원성을 받으며 진료비도 책정되지 않는 운동을 열정적으로 알려줘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몸을 방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허무해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것도 달리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결국 자신의 신체에서 나오는 힘이 있어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힘을 나눌 수 있는 것이죠. 오랫동안 달려왔기에 이제는 나라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달리기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고, 어떤 부분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사실 구별하기 어려워요. 다만 체력 문제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던 경험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진료를 봐도 그다지 지치지 않죠.
20년 동안 달리면서도 ‘러너스 하이’는 경험한 적이 별로 없으며, 본인의 달리기는 오히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놓인 반가사유상’이나 ‘김장김치를 품은 옹기’에 가깝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20년 동안 대부분 혼자 달렸어요. 음악도 듣지 않죠. 속도에 따라 거칠어졌다 잠잠해지는 숨소리, 타닥타닥하는 발소리, 그리고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친구 삼아 달리죠. 제 달리기는 그냥 투박한 버티기에요. 옹기가 계절의 변화를 버티는 동안 그 안에 있는 김치가 잘 익어가는 것처럼요. 달리기는 환자들의 재활 과정과도 닮았어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죠. 재활의학과 의사는 기다림에 익숙해요.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달리기도 마찬가지죠.
<길 위의 뇌>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보통 뇌 질환은 본인이 살아온 결과라기보다는 불운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한데, 뇌 질환 역시 삶의 궤적이 이끈 결과이고, 회복과 치유 역시 스스로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부분이었어요. “일은 나에게 삶을 조망할 기회를 주었다”고 말했는데, 일을 통해 삶의 어떤 측면을 발견했나요? 같은 병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아요. 어떤 사람은 재활을 통해 예전의 건강하던 삶으로 돌아가려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평생 환자로 살아가죠. 물론 장애가 심해서 돌봄이 필요한 환자도 있지만, 장애가 심하지 않음에도 스스로를 포기하고 ‘나는 이제 이 몸으로 아무것도 못 해’라고 생각해버리는 환자도 있어요. 저는 늘 생각해요. 같은 병을 겪으며 왜 어떤 사람은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놓아버릴까?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에요. 평소에 운동을 조금이라도 해봤거나, 금주를 해봤거나, 자기 몸을 위해 뭔가를 실천해 본 사람은 재활 치료도 끝까지 해내요. 반면에 그런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은 병이 생기면 더 깊이 가라앉아요. 모든 의지와 동력이 사라져버리는 거죠. 결국 그 힘은 건강할 때 만들어놓아야 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이 부모님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병에 걸리기 전엔 이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잖아요. 근데 저는 매일 환자를 보니까, 그분들이 저한테 계속 리마인드해 주니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운동화를 신게 돼요.
어릴 때는 나이가 들어도 책을 읽고 요리를 하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그렸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의 존엄은 결국 신체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뇌도 결국 신체예요. 뇌가 건강하지 않으면 우울해지고, 기력이 떨어지고, 의욕도 사라지며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시동이 안 걸리는 상태가 돼요. 우리는 그런 걸 흔히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뇌 그리고 몸의 문제일 수 있어요. 몸과 마음, 뇌는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아요. 결국 신체의 기동이 정신적 풍요를 만드는 것이죠.

Editor
KIM JI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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