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한여름 밤의 책
땀으로 뒤범벅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신간 네 권.
한여름과 여름밤은 하나의 단어로 붙여 쓴다. 그런데 한여름밤은 사전에 없다. 책을 만들다 ‘한여름밤’이라는 단어를 맞닥뜨리면 ‘한여름 밤’이라고 해야 할지, ‘한 여름밤’이라고 해야 할지 잠깐 고민에 빠진다. 머뭇거리다 결국 열 중의 열은 ‘한여름 밤’이라 띄어 쓴다. 글을 쓴 이가 분명 전달하고 싶었던 말은 ‘더위가 한창인 여름’의 밤일 것이기 때문에.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분주한 낮의 소란이 사라지고 다소 견딜 만한 온도에 적막이 찾아오는 한여름 밤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피곤함도 꾹 참고 잠을 물리치며 가장 빠르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나는 책장을 펼쳐 든다.
한국에 최근 소개된 오시로 고가니의 만화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에는 환상과 일상을 천연덕스럽게 넘나드는 단편 만화 일곱 편이 실려 있다. 내가 너를 사랑했음을 기억할 유일한 목격자인 스토브(비유가 아니라 진짜 난로, 그 스토브다)와 떠나는 이별 여행이라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되어버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을 그리거나, 설녀로 데뷔하기 위해 얼려 죽일 상대로 나를 점찍은 수상한 존재와 함께 한여름의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순간을 보내는 등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곤란한 상황에 한 스푼의 환상을 더하며 기분 좋은 향긋함을 남긴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스포츠에는 테니스가 있다. 탕, 탕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코트를 가르는 테니스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는 사람뿐 아니라 경기를 보고 있는 관객마저 잡념이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아무튼, 테니스>는 작가 손현이 22년 만에 테니스 레슨을 스스로 등록하면서 시작된다. 그사이 학업과 취업 등 인생의 관문들을 통과하며 경쟁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그에 따른 불안은 정신 건강을 흔들고 있었다. 단순한 공놀이 같지만 라켓 하나를 쥐고 온몸으로 하나씩 익혀가는 테니스 기술은 마치 인생의 기술 같다.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힘내는 대신 ‘그만둘 때 그만둬도 되고 실패하거나 져도 괜찮다’는 것을 배워가는 스포츠가 테니스라고.
한껏 달아오른 두 뺨을 식히기 위해서는 추운 나라 여행기를 펼쳐도 좋겠다. 소설가 장류진의 핀란드 여행기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과 국내 유일한 여성 빙하학자 신진화의 <빙하 곁에 머물기>는 표지부터 차가운 설산을 품고 있다. 우선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속 장류진은 2008년 교환학생 시절에 만나 단짝이 된 인생 친구 예진이와 15년 뒤, 그때 그곳으로 함께 떠난다. 그땐 모든 것이 서툴고 무엇이 될지 몰라 조바심을 내던 청춘이 있었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때 상상도 못했던 소설을 쓰는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있다. 지나온 시간은 앞으로의 삶도 쉽게 예단하지 말라고 가르쳐준다. 언제 어느 순간에 뜻밖의 운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일이니 남은 기대를 해봐도 좋다고.
<빙하 곁에 머물기>의 주인공 신진화도 빙하학자가 되기까지 여러 우연이 겹쳤음을 먼저 고백한다. 지구과학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나 연봉 순위에 따라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퇴사 후 대학원에 가면서 ‘빙하로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다. 그렇게 2012년부터 현재까지 빙하를 연구하며 프랑스, 캐나다 그리고 그린란드의 빙하 시추 현장까지 누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만 년 전에 생성된 빙하는 빙하학자들 사이에서 ‘냉동 타임캡슐’로 불리며, 과거를 읽는 열쇠가 된다. 기후위기를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미래 지구를 예측하는 이 생소한 빙하학자를 따라 그린란드 빙하 시추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80만 년간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해온 지구를 살피다 책장을 덮을 때는 우리는 영원한 불행도 영원한 영광도 없는 평범한 인생을 사는 생명체일 뿐이라는 위로가 묵묵히 다가온다. 빙하를 떠올리다 주변 공기가 한층 서늘해진 느낌은 한여름의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Editor
BAEK KAKYUNG
Writer
LEE JIEUN(‘유유히’ 대표)
Photographer
The Ingalls / Trunk Archive. COURTESY 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