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AMILY AT WORK

삶과 일의 경계는 흐려지고 전통과 현대는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일에 대한 태도와 신념, 철학을 나누는 가족의 일에 대하여.

피터 조(Peter Cho)와 아내 선영 박(Sunyoung Park)의 가족사진

뉴욕에서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가족이 있는 오리건으로 돌아와 오픈한 레스토랑 한옥(HanOak). 이 레스토랑은 그들이 함께 일군 첫 레스토랑이자 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첫 집이기도 하다.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공간
포틀랜드에 있는 독특한 콘셉트의 한식 레스토랑 오너 셰프 피터 조(Peter Cho)와 동업자이자 아내인 선영 박(Sunyoung Park)은 인터뷰 요청을 단번에 수락했지만,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터뷰를 거의 포기할 때쯤 선영 박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부고와 함께였다. 그녀는 LA로 날아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고,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에 있는 동생의 집에서 잠시 지내다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솔직히 아픔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요. 나아질 수가 없죠.” 그녀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고, 첫째 엘리엇이 달려와 엄마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슬픈 시간 속에서도 또 다른 행복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일까요.” 포틀랜드에 꾸린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은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2013년 뉴욕 레스토랑 셰프의 삶을 마무리하고 피터의 고향인 오리건으로 되돌아온 것도 피터 어머니의 건강 문제가 계기였다. 한옥(HanOak)은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오픈한 레스토랑인 동시에 ‘집’이다. 가족이 모이자 더 많은 가족이 생겼다. 둘째 프랭키도 한옥에서 태어났다. 이 공간은 여러모로 1980년대 한국의 모습을 닮았다. 마치 문방구나 분식점 주방 뒤 단칸방에 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처럼, 한옥의 키친 안쪽에는 복층 원룸으로 된 그들의 집이 있다. 아이들은 낯모르는 손님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며 자랐다.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키워내듯, 레스토랑 스태프들과 단골손님들이 아이들의 삼촌이고 이모였다. 좀처럼 가정에 집중할 수 없는 최고급 레스토랑 수석 셰프의 삶 대신, 한식 레스토랑 오너 셰프의 삶을 선택한 그들은 그저 ‘가족친화적인 레스토랑’이 아니라 정말 아이들이 뛰어노는 자신의 집에 낯선 이들을 초대했던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요리에 목말라 있는 포틀랜드에서 정갈하고도 창의적인 피터 조의 한식은 곧바로 관심을 모았다. 이어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 최고의 신규 레스토랑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넷플릭스 시리즈 <어글리 딜리셔스>에까지 소개되자 한옥은 미국을 대표하는 한식 레스토랑 중 한 곳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일부 손님이 당황하는 건 여전히 자주 있는 일이다. “생일 파티나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말 예쁜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고 오는 분들이 있어요. 아마도 완벽한 서비스와 우아한 분위기를 예상했을 텐데, 아이들의 무선 장난감 자동차가 계속 그분들 구두와 힐에 가서 부딪히는 거예요. 얼마나 미안하고 당혹스러운지. 컴플레인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깔깔 웃으며 먹어본 음식 중 최고였다며 칭찬해주는 분들도 있어요.”
엘리엇은 셰프의 아들답게 인터뷰 내내 칼로 오렌지를 정성스럽게 잘라 먹어보라고 내밀었고, 프랭키는 7살다운 장난기와 에너지로 엄마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바쁜 부모의 삶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이들은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웠다. “레스토랑이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자야 했는데, 벽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밖의 소리가 다 들려요. 다행히 아이들에게 번잡한 레스토랑 소리가 백색소음이 되기도 했고, 이렇게 저렇게 환경에 맞춰 적응했던 것 같아요.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찾아주는 일이 가장 어려웠어요.”
그사이 그들은 캐주얼 레스토랑 토끼(Tokki)를 오픈하고 정리했으며, 도축한 육류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는 고깃집 제주(Jeju)를 오픈했다. 아이들이 쑥쑥 자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한옥 내 작은 원룸은 가끔 사용하는 세컨드 하우스가 됐다. 일터와 가정을 아예 하나로 뭉뚱그려버린 삶 속에서 밸런스는 과연 어떻게 찾고 있는지, 에너지 넘치는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일하는 건 어떤지 물었고 대답은 간단했다. “밸런스는 찾지 못했고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웃음)” 그리고 그들은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저희는 사실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사람들이에요. 어쩌다 가족들이 함께하는 집이자 레스토랑인 한옥을 오픈하면서 우리의 삶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됐는데, 여전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참 어렵고 힘든 것 같아요.” “저희는 레스토랑과 가족을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반면 다른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정말 너무 어려워요. 특히 매우 경쟁적이고 완벽히 프로페셔널해야 하는, 적어도 그렇게 보여야 하는 업계에서는 참 힘들어요. 결코 불평하는 건 아니에요. 삶 속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갈등의 순간 속에서 저희는 계속 타협점을 찾아나가고 있어요.”
레스토랑 한옥이 특별한 이유는, 한국과 미국의 문화를 버무린 셰프 피터 조의 음식 세계와 더불어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고 다소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는 한국 대가족의 문화가 그 공간 안에서 타협점을 끊임없이 찾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사랑과 관계를 배우면서 먹고 떠들고 울고 웃으며 자란다. 원래 가족이, 삶이 그런 것이다.

아버지 아민 카데르와 딸 메리엠 슈블랄

아버지 아민 카데르와 딸 메리엠 슈블랄.

생제르맹 데 프레 매장의 내부, 아민 카데르의 첫 향수 컬렉션

(왼쪽부터) 아민 카데르가 직접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 생제르맹 데 프레 매장의 내부. 메리엠 슈블랄이 입사하고 진행한 아민 카데르의 첫 향수 컬렉션.

우아한 프렌치 쿠튀르의 철학적 계승
오늘날 패션은 옷 이상의 것이다. 디자이너의 철학을 바탕으로 의상과 라이프스타일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때로는 시간이 흘러 가족이라는 유산으로 연결된다. 아민 카데르(Amin Kader)는 1978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오트쿠튀르를 고집하며 파리의 수많은 패션 브랜드 사이에서 당당하고 우아하게 최상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50년간 쌓은 전통과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승하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구상 중에 있다. 이 과정에는 디자이너이자 창립자인 아민 카데르와 그의 딸 메리엠 슈블랄(Meriem Cheblal)이 존재한다. “1960년대, 처음 파리에 왔을 때 생제르맹 데 프레에 있었어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에는 멋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린 제가 느끼기에도 음식과 서비스가 훌륭했죠. 그렇게 파리로 이주를 결심하고 옷 만드는 재주를 살려 매장을 열었어요.” 재단 솜씨가 대단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사교계 여성들은 아민 카데르에게 옷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파리, 특히 생제르맹 지역의 여성들이 매우 이기적이라는 거예요. 자기 옷과 똑같은 옷을 다른 사람이 입는 것을 꺼려서 홍보를 안 해주더라고요.(웃음)” 당시 아민 카데르는 알라이야, 겐조 등의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다.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특수 고객들만을 위한 쿠튀르, 그리고 파리 아틀리에에서 한정 수량으로만 생산하는 방식으로 상류층 니치 마켓을 위한 옷을 만들기로 했고, 그 선택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직접 옷을 만들고 매장의 인테리어를 관리하는 등 그의 열정은 50년 전과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의 50년은 딸 메리엠 슈블랄의 비전이 더해질 예정이다. 샤넬에서 마케팅과 브랜딩 컨설팅 관련 커리어를 쌓은 뒤 아버지 회사에 입사한 것은 전적으로 메리엠의 결정이었다. “딸이 정치학을 전공하고 한창 열심히 일하다가 돌연 패션 비지니스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아이구!’ 했어요. 패션 업계는 힘든 곳이에요. 패션 관련 일만은 안 했으면 했거든요. 그런데 결국 학위를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또 내 회사에 입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었어요. 모두가 원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왜 여기로 오고 싶냐고요.” 메리엠의 비전은 확고했다. 오너의 딸이라는 단순한 명분을 넘어 어릴 적 봉제실에서 자르고 남은 천들을 가지고 놀며 성장했고, 10대에는 부티크 세일즈 아르바이트를 거친 그녀만큼 브랜드의 DNA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장인 정신과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서비스 마인드, 매스마케팅을 지양하는 철칙은 지키면서 젊은 세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기술과 스타일을 접목하는 것이 아버지와 딸이 현재 진행 중인 협업의 내용이다. 아민 카데르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해줄 만큼 브랜드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크다. 카트린 드뇌브, 소피아 코폴라, 샤를로트 갱스부르 그리고 프랑스 재력가들을 고객으로 둔 작지만 큰 브랜드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우아함과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지 오랫동안 보여줄 것이다.

배용희 대표, 배명직 명장

호랑 서촌의 배용희 대표와 금속 표면 처리 분야에 45년간 종사한 배명직 명장.

호랑 서촌의 커틀러리, 아버지가 만든 칼과 아들이 만든 칼, 호랑 골드 에디션 커틀러리

(왼쪽) 배용희 대표의 디자인과 배명직 명장의 기술력이 더해진 호랑 서촌의 커틀러리.
(오른쪽위) 아버지가 만든 칼과 아들이 만든 칼.
(오른쪽아래) 호랑의 골드 에디션 커틀러리.

장인 정신의 전승
올해 초 서촌에 문을 연 호랑(Horang)의 공간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게 구현되었다. 권혁율 목재창호 명장과 협업해 전통 한옥의 구조를 고스란히 살렸다. 이 외에도 일본 카미소에 작가의 작업을 구현한 실내 벽, 이자성 청송 한지장의 한지를 사용한 캐비닛, 박홍구 작가가 탄화목 작업을 한 카운터 등 한국과 일본의 여러 장인의 기술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에 호랑의 커틀러리가 진열되어 있다. 숟가락과 젓가락처럼 자주 사용하는 물건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 더 다채롭고 선명해진다. ‘일상을 위한 조각품’을 지향하는 호랑의 배용희 대표는 입구에 걸려 있는 조선 시대의 책갈피 ‘서산’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책을 몇 번 읽었는지 표시할 수 있는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책갈피는 당시 선비들의 필요와 멋을 동시에 충족시켰을 거예요.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서 계속 손이 가는 물건이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물건이 아니라 한 세기가 넘도록 남아 있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호랑의 커틀러리는 배용희 대표의 아버지인 배명직 명장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금속 표면 처리 명장으로 선정된 배명직 명장의 기술을 통해 호랑의 물건은 광택과 아름다움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무수히 많은 역경 속에서 45여 년간 몰두해 일구어낸 기술력과 장인 정신이 아들이 만든 물건과 브랜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법도 한데, 배명직 명작은 여느 아버지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에요. 나는 한평생 ‘쟁이’로 살아왔지만 아들은 다른 일을 하길 바랐죠. 하지만 고집이 있는 아들이기에 앞으로 잘할 것이라 생각해요. 내 기술과 아들의 디자인이 합쳐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앞으로 다양한 일을 벌일 수 있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뻗어나갈 길도 보일 거예요. 오랜 역사를 이어온 스위스의 쌍둥이 칼도 결국 소재를 다루는 기술이니까요.” 인터뷰 직후에 배명직 명장은 본인이 만든 칼을 선물했는데, “사실 내가 만든 칼이 더 좋다”는 장난스러운 귀띔을 더했다. 그러나 아버지 못지않게 일에 대한 자긍심과 확고한 기호를 지닌 배용희 대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마음에 쏙 드는’ 호랑의 칼을 꺼내 왔다. 머지않아 호랑 서촌 공간에서 칼도 선보일 예정인데, 칼을 놓을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아직 진열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 두 장인은 기질이나 취향 면에서는 서로 전혀 다르다고 말하지만 일에 대한 집념과 도전 정신, 즉 태도 면에서는 꼭 닮아 있다. 다른 장인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도 공통분모다. 대한민국숙련기술인총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배명직 명장은 9월 9일을 ‘숙련기술인의 날’로 제정하는 일에 앞장섰고, 배용희 대표는 호랑 서촌 공간에서 앞으로 다양한 장인의 작업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처럼 장인의 시선과 태도, 직업 정신은 세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

아버지 가보르 울베츠키와 딸 라헬 울베츠키

아버지 가보르 울베츠키와 딸 라헬 울베츠키.

금박 샘플들

울가도르가 개발한 다양한 컬러의 금박 샘플들.

아버지와 딸이 창조하는 황금빛 예술
파리 고급 브랜드 매장의 인테리어에서 발견되는 금빛 패턴의 벽, 가구의 장식 대부분은 프랑스의 금박공예 공방 울가도르(Ulgador)에서 제작된다. 금박공예란 100나노미터 두께의 아주 얇은 금박을 손끝으로 톡톡 누르며 문양을 찍어내는 기법인데, 울가도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무형문화유산기업(Entreprise du Patrimoine Vivant, EPV)으로 선정될 만큼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헝가리 난민 출신으로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 예술가 가보르 울베츠키(Gabor Ulveczki)가 우연한 기회로 종이에 금박 패턴을 입혀달라는 고객의 요청을 받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실제 금이 아닌 놋쇠를 녹여 동일한 효과를 내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공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금속공예 기법을 재해석해 금속 잎을 산화 부식시키는 독특한 기술을 개발하며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색감과 텍스처를 구현했고, 일반적인 금속 장식과는 차별화된 독보적인 예술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그리고 현재는 금박, 은박, 동박 등 수십 가지 컬러 레퍼런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무, 패브릭, 유리 등 적용 가능한 소재에 제한이 없을 정도다. 울베츠키는 ‘물’을 제외하고는 뭐든지 금박을 입힐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이러한 기술력 덕분에 샤넬, 디올, 까르띠에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며 오늘날 하이엔드 디자인 업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기술의 개발은 아버지 가보르 울베츠키의 몫이었지만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딸 라헬 울베츠키(Rahel Ulveczki)다. 올리비에 드 세르 예술공예학교에서 장인 교육을 받고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라헬 울베츠키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손재주로 아버지의 호출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이미 15세 때 그림을 복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만큼 실력이 좋았고, 대학을 다닐 때는 고미술 복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어요. 아버지께서 가끔 부르시면 도움을 드리긴 했지만 당시엔 절대 아버지 공방에서 일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런데 호출이 점점 잦아졌고 공방 출입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이 묶이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합류한 시기는 2012년부터입니다.” 그녀의 합류 이후 울가도르는 한층 더 현대적인 감각과 예술적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1996년에 시작된 공방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한다. 1983년 정치 난민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울베츠키 가족이 무형문화유산기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는 데는 가족의 끈끈한 유대감이 뒷받침되었다. 이처럼 울가도르는 단순한 공방을 넘어 부녀가 함께 만들어가는 국가적 문화유산이자 독창적인 미적 탐구의 장이다. 전통과 현대, 아버지와 딸, 장인 정신과 혁신이 만나는 이 특별한 공간은 앞으로도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넓히며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갈 것이다.

EDITOR
KIM JISEON
PHOTOGRAPHER
마이클 캐리(Michael Cary), 셀린 사비(Céline Saby), 이재안, 셀린 사비(Céline Saby)
WRITER
손혜영, 양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