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글로 배운 사랑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더듬는 에세이 다섯 권
CJ 하우저의 <두루미 아내>(열린책들).
인생에 난제가 생기면 책부터 찾아 드는 사람들이 있다. 2000년대 코믹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 60회에서 키스를 글로 배운 이현경이 대표적이다. 1. 눈을 감는다, 2. 입을 벌린다, 3. 혀를 내민다, 4. 혀를 학 접듯 굴린다. 책의 지문대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함께 시청하던 가족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나는 크게 웃지 못했다. 그렇다. 나 역시 글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물론 지금껏 살면서 몇 가지는 글로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관해선 도움이 된다고 단언하고 싶다.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평가받는 장 뤼크 낭시도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기’ 그리고 ‘책으로 사랑을 공부하기’ 두 가지를 중시하지 않았나. 2월, 밸런타인데이를 빌미로 사랑의 주변을 더듬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신간 다섯 권을 추천한다. 한 권의 시집과 네 권의 에세이다. 책을 쓴 작가들은 실제로 자기 삶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성찰했던 사랑의 순간을 보다 구체적으로 절절히 전해줄 것이다.
<두루미 아내>는 파혼을 하고 소설 취재를 위해 두루미 답사를 떠난 저자 CJ 하우저가 외딴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 진솔하게 쓴 에세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두루미 여자’에 빗댄다. “두루미 여자는 자신이 두루미인 걸 알게 되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밤마다 부리로 깃털을 몽땅 뽑아낸다. 자신이 돌봐주어야 하는 새이고, 날 수 있는 새이며, 생명체가 가질 법한 욕구들을 지닌 생명체라는 사실을 그가 모르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 두루미 아내는 탈진한 상태가 되지만 다시 인간 여자로 돌아온다. 여자가 되기를 계속하는 일은 스스로를 아주 많이 지워내는 작업이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몽땅 뽑힌 몸을 보살핀다. 그 결과 그녀의 글은 <파리 리뷰>에서 100만 회 이상 조회되며 비슷한 상처를 입은 독자를 위로했다. 다소 음울한 주제일 수 있지만, 속사포처럼 내뱉는 에피소드와 문체는 유쾌해서 미칠 지경이다.
CJ 하우저의 개인적 사건들이 외국에서나 있을 법해 잘 이입되지 않는다면, <술 없는 밤>은 당신이 지우고 싶은 연애의 추억까지 소환할 것이다. 오지은, 서한나, 김일두 등 감칠맛 나는 필력을 지닌 이들이 밤과 술에 관해 쓴다. 과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밤과 술을 빼놓을 수 있을까? 그중 서한나는 “또 거지 같은 것을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속수무책한 밤에 대해 얘기한다. 그에게 강한 자극을 남긴 ‘샴푸 실랑이’에 대해, 상대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오는 그 길의 컴컴하고 시원한 공기에 대해 말이다. 반면 음악가 오지은은 술 없는 밤에 대해 쓴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점점 익어가는 술자리에 참석하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그들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어느새 잊고 싶던 흑역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심지어 어디선가 소주의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다. 그러면 <술 없는 밤>을 멀리 밀어두고 좀 더 클래식한 사랑을 느껴볼 시간이다.
앨리스 오스월드의 <다트>(고트), 서한나 외 5인의 <술 없는 밤>(글항아리), 윌리엄 해즐릿의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아티초크),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애편지>(을유문화사).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연애편지>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7년부터 17년간 미국 소설가 넬슨 올그런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묶은 서한집이다. 그녀는 당시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 중이긴 했으나, 우연한 사랑을 허용하는 둘의 규칙대로 넬슨 올그런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맘껏 표현했다. 둘의 설레는 첫 만남부터 사랑이 무르익고 그리워하다가 갈등하고 헤어지고 결국 우정으로 변하다 끝내 연이 끊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편지의 내용 중 카뮈, 콜레트, 지드, 자코메티, 피아프, 장 콕토 등 20세기를 풍미한 예술가들을 직접 목격한 기록도 흥미진진하다. 보부아르의 평가에 따르면 혹자는 ‘너무 못생겼다’거나 평단의 반응이 평가절상이라는 등의 솔직한 감상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을 써 내려간 담대하고 혁명적인 작가의 이미지와 달리 올그런의 편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심지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만 재미있다.
단것도 너무 많이 먹으면 질린다. 그럴 때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집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시니컬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혐오, 죽음,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대해 날카롭고 매정한 펜을 들이대는 그 역시 사랑이란 주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이제는 사랑에 대해 감히 한마디만 하겠다”로 운을 뗀 해즐릿은 다정함은 관능이라고 말한다. 타고난 기질이 내향적이고 사람을 기피한다면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랑받고 싶다면 다정함을 연마하라는 것. 1800년대 사람의 말이라고 흘려듣기에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 아닌가.
마지막을 장식할 책은 <다트>다. 사랑의 대상이 변화무쌍할 때 우리는 고통받는다. 하지만 정원가이자 시인인 앨리스 오스월드가 사랑하는 대상에 함께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모든 사랑의 덧없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앨리스 오스월드는 3년간 다트(Dart)강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과 관계 맺는 생명체들의 언어를 수집했다. 카누 타는 사람, 보트 만드는 사람, 낙농업자, 자연학자, 하수 처리 업자, 동네 아이들, 굴 따는 사람, 도보 여행자가 강을 이야기하고, 강 앞에서 살고, 강에 묻는 말들을 듣고 시를 썼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쉽게 읽히는 이 시집은 2002년 T. S. 엘리엇 상을 받았고, 최근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됐다. 특히 김영나 디자이너가 맡은 책의 만듦새가 심상치 않다. 모든 왼쪽 페이지에는 쪽수가 비정형적으로 인쇄돼 있는데, 책을 빠르게 넘기면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형상을 볼 수 있다. 강가의 어느 카페에서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책이다. 다시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돌아가서, 별걸 다 책으로 배우는 이현경은 무슨 일이든 부딪혀보는 당당하고 용감한 여자다. 책으로 배운 요리를 실패하고 화장을 망치고 첫 키스가 우스꽝스러우면 어떤가? 미지의 영역을 용감하게 더듬어봤다면 그걸로 큰 의미가 있다. 책으로라도 무엇이든 탐험해보는 이들에게 올 2월에는 꼭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비록 곁을 줄 인간을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책들이 있다
Editor
BAEK KAKYUNG
Photographer
SHIN HOON
Prop
장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