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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ITE
새 연필을 깎고 다이어리의 첫 장을 넘기면서 고요히 새해를 맞는 이유
MONTBLANC 뱀의 해를 기념하는 만년필과 잉크는 레전드 오브 조디악(The Legend of Zodiacs) 컬렉션 각각 8백84만원, 5만8천원.
희망은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엄지 길이의 몽당연필 일곱 자루를 유리병에 넣는다. 2024년의 몽당이들이 알록달록하다. 새 연필을 고른다. 1970년대 생산된 연필이다. 검은색 도루코 칼을 꺼낸다. 조심조심 벗겨내듯 연필을 깎는다. 나무 냄새가 소박하다. 이 쉰 살이 넘은 연필에는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까.
12월 31일과 1월 1일을 연결하는 시간, 많은 상상과 계획이 뒤섞이는 그 순간은 지난해의 마지막 기억과 새해의 첫 기억이 만나는 ‘사이 공간’이기도 하다. 내내 반복되어온 1초와 다르지 않은 그 1초로 해가 바뀐다는 건 여전히 이상한 감각이지만, 삶과 기억의 강인한 지속성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움은 살수록 더해진다. 아주 특별한 ‘틈’ 같은 그 시간, 나는 몽당연필을 보관하고 새해 첫날 쓸 연필 몇 자루를 골라 깎는 것으로 끝과 시작을 잇는다.
처음 고른 건 1970년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생산된 연필이다. 독일 여행 중 우연히 들른 문구점에서 발견하고 망설이다가 “혹시 같은 연필을 더 살 수 있을까요?” 물었더니 주인이 말없이 사라졌다가 뒤쪽 창고에서 한 박스를 들고 나온 바로 그 연필이다. 지금은 한 자루 가격이 그때보다 몇 배나 올랐는지 계산이 힘들어졌을뿐더러 몇 배를 지불한다 해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제조업이 활발하던 시기의 나무, 흑연과 디자인의 질을 이제는 기대할 수 없다. 연필 수집가들도 원하는 빈티지 연필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리는 말이 있다. “당신이 소중히 아끼는 연필을 나누면 더 귀한 연필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연필 수집 30년, 이 말은 여러 번 현실이 되었다. 주로 글을 쓰는 작가 친구들이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연필을 선물해왔다. 그들의 생년, 또는 그들이 사랑하는 작가의 생년을 기억해뒀다가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빈티지 연필을 건네는 일을 좋아한다. 그럴 때 연필은 그들이 태어난 시대의 나무와 흑연과 흙, 물을 담은 역사적 사물이 된다. 오래전 그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호흡했던 존재. 누군가의 삶과 경험, 기억을 지지하는 의미로 나는 망설임 없이 연필 서랍을 열곤 했다. 그러고 나면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네모난 흑연 연필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브랜드의 연필이 내게로 왔다.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연필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전달될 때 함께 흐르는 마음만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연필을 고르며 새해를 맞는다. 어떤 연필은 나보다 일찍 세상에 나와 더 오래 잔존한다. 내가 사라져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마음도 그럴 것이다. 연필은 그런 마음을 상상하게 하고, 내게 희망은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이어서, 나는 또 연필을 깎는다. 김지승(<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저자, 독립연구자)
HERMÉS 말 모양의 사마르칸트 문진은 80만원. MIU MIU 코냑 색상의 가죽 다이어리는 59만원.
SWAROVSKI 로즈 골드 톤의 볼 포인트 펜은 10만5천원.
한 해가 만져지는 수첩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속도도 빨라지는 걸까. 새로운 숫자에 간신히 적응할 때쯤이면 또 다른 숫자의 해로 넘어가는 기분이다. 매해 마지막을 장식하는 12월 31일과 첫 시작인 1월 1일은 시간상으로는 그저 이틀일 뿐이지만, 그 이틀 차이로 ‘작년’과 ‘올해’가 된다. “Happy New Year”를 외쳐봐도 새해는 실감 나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은 식탁에서 그저께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일주일째 읽다 말다 반복한 책을 읽고 있는데 실감이 날 리가 있나. 그래서 사람들이 새해 첫날이 되면 수많은 인파와 추위를 감내하며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지도 모른다. 사실 일출을 보고 돌아와도 새해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모처럼 만의 결연한 의지도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머릿속 저편으로 흐지부지 사라져버리기 일쑤니까. 작년이 되어버린 어제와 올해가 되어버린 내년을 실감 나게 해줄 확실한 물건, 10년째 쓰고 있는 호보니치 테초의 다이어리를 꺼낼 시간이다. 엄지와 중지에 힘을 주고 새 다이어리의 첫 장에 글자를 채워 넣으면 신기하게도 비로소 해가 바뀌는 것이 실감이 난다. 다이어리의 위상과 역할이 지갑만큼 중요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지갑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바뀌는 자잘한 일정 정리와 주요 메모는 스마트폰 앱이 훨씬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기록하기 편해진 것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스마트폰 앱에 쌓인 방대한 정보들은 한 철이 지나면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록물이 아닌 처리 불가한 데이터가 된 것 같다.
2016년부터 첫눈이 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호보니치 테초의 다이어리를 주문하며 새해를 기다린다. 내가 매해 구매하는 것은 아트&사이언스(Art&Science)의 디렉터 소니아 박이 디렉션한 영문 버전. 1년 365일을 모두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이어리라고 할 수 있지만 ‘수첩’이라는 일본어 뜻을 지닌 테쵸(手帳)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매일을 기록하는 작은 수첩이다. 손으로 써야 하는 다이어리는 효용성 측면에서는 확실히 떨어지지만 개념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다이어리라고 생각하면 기록하지 않은 페이지에 대한 게으름과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호보니치 테초의 슬로건처럼 ‘매일의 수첩’이라고 생각하면 기록하지 않은 날도 자책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생이 콘서트에 가고 오마카세를 먹는 특별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수첩에 안 쓰는 날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일 년 동안 쓰는 수첩’의 용도로 호보니치 테초를 쓴 지 9년,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A6 사이즈지만 성경책을 닮은 클래식한 모양새와 특유의 종이 질감, 180도로 쫙쫙 펼쳐지는 실 제본 방식,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과 구성 덕분에 매년 다른 걸 써볼까 하면서도 결국은 호보니치로 돌아오게 된다. 그뿐인가. 달력과 먼슬리 같은 기본적인 기능 외에 국제 사이즈표, 치수 정보, 격언, 매해 업데이트되는 일본식 메뉴 소개가 빠지지 않는데, 특히 부록에 붙어 있는 줄자와 사이즈표는 호보니치 테초 수첩의 가장 잘 어울리는 용도 중 하나가 여행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매해의 끝 무렵이면 그동안 썼던 호보니치 테초 수첩을 펼쳐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해는 일을 많이 했는지 모서리가 너덜너덜 닳아 있고, 또 어떤 해는 반성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날것의 일기가 많고, 쇼핑 리스트부터 집 구조를 바꾸는 도면, 책을 필사한 문장까지 적혀 있다. 물론 해마다 꾸준히 기록한 것은 아니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됐던 연도는 새 수첩이 아닌가 싶을 만큼 깨끗한 그대로의 모습이다. 뭔가를 기록할 수도 없었던 상태 역시도 인생 중 일부라는 것을 아직도 새것인 수첩이 증명해주는 것 같다. 몇 년치 수첩을 들여다보면 그해의 이슈와 고민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아날로그가 선사하는 깨달음 중 하나다. 수첩을 후루룩 훑어보기만 해도 알게 모르게 한 해가 정리되고 또 새로운 해를 만져보는 경험을 하게 해준달까. 2025년 한 해 동안 동고동락할 시간을 지그시 만져본다. 올해도 잘 부탁해. 홍안(마케터, 훌라 강사)
WRITTEN WORD CALLIGRAPHY 왁스 스토브 세트는 14만5천원.
MONTBLANC 홀리데이 시즌을 위한 엽서와 봉투는 가격 미정.
나무 손잡이가 달린 실링 왁스 스탬프는 에디터 소장품.
디자이너의 태도를 담는 공간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는 몰스킨 다이어리나 작은 수첩을 자유롭게 쓰는 교수들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수첩을 아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손이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고,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였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쓰려고 애쓰는 대신,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감정을 그대로 쓱쓱 담아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그때의 나는 한 권의 다이어리를 얼마나 아끼며 썼는지 모른다. 한 페이지를 채우기 전에 여러 번 고민하고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때로는 이 작은 공책에 적을 내용이 과연 충분히 가치가 있는지조차도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 교수들의 모습은 내게 하나의 목표를 제시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소위 ‘플렉스’하며 다이어리를 쓰고 싶었다. 내용을 가득 채우고 필요하면 다음 다이어리를 또 사서 사용하는 모습, 이것이 내가 꿈꾸던 디자이너의 태도였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다이어리와 수첩을 자유롭게 쓰며 그날의 기록과 생각을 남기고 있다. 찢어지거나 잉크가 번져도 개의치 않는다. 그것조차도 나의 흔적이고 나의 기록이다. 내게 다이어리란 단순히 하루를 적는 도구가 아니라 그날의 나를 담아내는 캔버스이자 미래의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연결고리다. 우리 스튜디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올해 마지막 방학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그동안의 프로젝트와 작업 과정을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스튜디오를 위한 새로운 다이어리가 준비되어 있다. 이 다이어리는 단순한 계획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의 다음 한 해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중요한 시작점이다.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는 언제나 흥분과 설렘을 준다. 무엇보다 우리의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는 지난 기록들 속에서 발견한 작은 깨달음과 성장이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의 기록 속에는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시도하고, 성공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성을 정하는 지침이 된다. 내일을 기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준비하는 계획들이 단순히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과정과 경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의 감정을 체험으로 승화시키고, 그 과정 속에서 발견한 소중한 아이디어를 새해 프로젝트에 담아낼 것이다. 우리 스튜디오는 단순히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다이어리는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내일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다이어리에 적힐 첫 번째 기록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성장과 도전 그리고 더 나은 디자인을 향한 여정을 담아낼 것이라는 점이다.
다이어리는 나의 시간, 나의 감정, 나의 미래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 가치를 아는 순간, 다이어리를 단순한 도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작업을 다시 쓰는 공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스튜디오의 내일을 향한 설렘을 현실로 만들어줄 것이다. 김종완(종킴디자인스튜디오 대표)
PALOMINO 블랙윙 연필 스타터 세트는 1만6천원.
TOMO 블레이즈 저소음 탁상시계는 4만3천원.
웃기는 달력
새하얗고 귀여운 모습의 롭이어 토끼가 입에 붉은 피를 흥건히 묻힌 채 앉아 있다. 그곳은 푸른 잔디가 아니고 갓 도축한 듯 새빨간 고깃덩어리 위다. 몇 가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번뜩인다. 약 300년 뒤 모든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경계가 흐려진 디스토피아적 생태계의 모습, 혹은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살점을 베어 무는 어떤 통쾌하고도 상징적인 구도도 떠오른다. 이를테면 모두가 연약하고 소심하게 여겼던 토끼 한 마리가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던 천적을 때려잡고 그 살점을 질겅질겅 씹는 순간을 나타낸 거라면 좋겠다.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이 달력을 본 것이 아니었다면 두어 시간 정도는 별별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공상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매달 기기묘묘한 공상의 시간을 선사하는 이 달력은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사진작가 피에르파올로 페라리(Pierpaolo Ferrari)가 이끄는 토일렛페이퍼(Toiletpaper)가 디자인했다. 이들의 블랙 유머는 각자의 분야에서, <토일렛페이퍼>라는 매거진에서 이미 잘 알려진 바 있다. 매년 하나의 콘셉트로 8절지의 달력을 만들어내는데, 무심코 넘겨볼 수 없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게다가 톡톡 튀는 컬러로 디자인해 벽에 그저 걸어놓기만 해도 소소한 인테리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총 다섯 해에 걸쳐 이들의 달력을 한 해의 끝, 12월마다 주문했다. 가능한 한 토일렛페이퍼 공식 홈페이지에서 주문해 해외 배송을 받는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12월 말쯤 깜짝 선물처럼 달력을 받아 들고 싶어서다. 얇은 카드보드지에 비닐 포장된 달력을 떨리는 마음으로 해체한다. 그때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새해의 1월 달력만 잘 펴 볼 수 있도록 주의하는 거다. 절대로 휘리릭 넘기지 않는다. 매달 어떤 기가 막힌 사진이 나올까 기대하는 것이 이 달력을 사는 가장 큰 매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의 달력에는 한국의 휴일이 기록돼 있지 않으니 굳이 한 해의 휴일을 세어볼 일도 없다. 물론 어떤 달에는 카텔란과 페라리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난해한 이미지가 나오기도 한다. 2024년 11월, 나는 거대한 바퀴벌레가 깨끗한 칫솔에 기어오른 사진을 한 달 내내 감상해야 했다. 불현듯 잠에서 깨 1층 거실로 내려오다가 벽에 육중한 ‘바 선생’이 오신 줄 알고 여러 번 뒷걸음쳤었다.
지구 어딘가 칫솔 위에 바퀴벌레를 놓거나 암탉에게 거울을 보여주거나 거위 등에 오리를 태우는 상상을 하는 독특한 듀오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누군가를 조금은 웃기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의미심장하게 피식 터지는 웃음을 유발하고 싶다. 웃기기 위해선 웃긴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하는데, 그 행위가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을 순식간에 가볍게 만든다. 비록 나는 그 누구도 못 웃겼지만 토일렛페이퍼가 달력을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까지 매년 걸어둔다면 씁쓸한 블랙 유머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일 년을 살아가는 일도 어쩐지 재미있다. 나는 스마트폰의 달력 아이콘을 눌러 날짜를 확인할 때는 절대로 마주칠 일 없는 그 순간을 위해 달력을 산다. 마지막은 쓸데없이 비장하게 조르주 바타유의 문장으로 끝낸다면 누군가를 조금 웃길 수 있을까. “우스꽝스러워지지 않고는 깜짝 놀랄 일을 이룰 수 없다. 전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전부다.” 백가경(<에비뉴엘> 피처 에디터)
Editor
BAEK KAKYUNG
Photographer
HWANG BYUNG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