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기억의 저장소

모리함은 사랑의 기억을 보관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모리함 최나영 대표 어머니의 결혼사진과 진주 목걸이를 표구한 액자는 모리함의 시작점이 되었다.

평생 동안 신경외과를 운영한 한 아버지의 직업적 헌신이 담겨 있는 물건들.

우리의 미래에 빛바랜 가족 앨범을 들춰보며 추억을 곱씹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추억 중 상당 부분이 배터리가 방전된 구형 휴대폰 안에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그리고 일상의 기쁨과 슬픔이 얼마나 빨리 휘발되는지 상기해보면 좀 더 부지런하게 기록하고 담아두지 못한 시간들이 아쉬울 뿐이다. 개인의 의미 있는 소장품을 표구해 견고한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모리함의 작업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그리워할 모(慕), 다를 리(異), 지닐 함(函)이라는 한자를 써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을 다르고 특별하게 담는다’는 의미를 담았고, 기억을 뜻하는 영어 ‘memory’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모리함은 한국 전통 표구 기술을 기반으로 액자·병풍·족자·화첩·서책 등 기억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물성을 만든다. 사진이나 편지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물건을 담는 액자 작업이 대표적이다. 옹이가 없는 좋은 나무를 깎아서 프레임을 만들고 내용물의 보존성을 높이는 보강 작업을 한 후, 쓸고 닦고 매만지는 수천 번의 손길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IT 기업에서 기획자로 일하다 전통 표구 기술을 사사받아 문화재 수리 기능자가 된 모리함의 최나영 대표는 이를 집을 지어 올리는 과정에 비유한다. “주로 글이나 그림을 배첩했던 전통 표구와는 달리, 모리함은 다양한 물성의 오브제를 액자에 담는 작업을 하잖아요. 내용물에 따라 표구에 사용되는 재료와 도구도 다양해 매번 하나의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기분으로 작업을 해요. 이 과정에는 작업자뿐 아니라 의뢰인의 시간과 정성도 들어가요.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떤 추억을 간직할지 결정하는 과정이 기억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물건을 집 안 어딘가에 두는 것과 액자에 소중히 담아 언제든 볼 수 있는 장소에 두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일이에요. 어느 날 남편이 액자를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 집 안에 액자라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고, 이 공간이 기억을 품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고. 결국 표구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에 정성을 쏟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하여 모리함에는 크기도, 형태도, 품고 있는 이야기도 다양한 물건이 모인다. 부모님이 연애 시절에 찍은 흑백사진, 아이가 태어난 직후 입은 배냇저고리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의 작은 신발들, 여행지에서 하나씩 사 모은 마그넷, 아버지가 평소 즐겨 사용하던 파이프와 어머니가 특별한 날에만 사용하던 장신구, 청진기나 주판 등 부모님이 평생 헌신한 직업과 소명 의식을 짐작하게 하는 도구들, 아이가 처음으로 그린 가족의 그림과 평소에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진심을 담아 써 내려간 편지 등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성채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수호품이다. 무섭도록 출렁이는 삶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것은 결국 사랑받았던 기억과 좋았던 추억들이니까. “언젠가는 깨진 찻잔을 들고 모리함에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요. 아내분이 뜨거운 물을 붓다가 찻잔을 깨뜨렸는데, 매일 사용하던 찻잔이 깨진 것에 너무 속상해해서 찻잔을 표구해 선물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오신 게 아니었어요. 아내에게 찻잔이 가지는 의미를 곱씹고 깨진 조각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하신 것이 대화에서 드러나더라고요. 이제 두 분은 깨진 찻잔을 볼 때마다 속상함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떠올릴 것 같아요. 이처럼 작품성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인 것 같아요. 모리함을 찾는 손님들은 결국 이야기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에요.”

(위쪽) 딸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한 아버지의 다정한 마음.
(아래쪽) 한 아이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신발들을 모았다.

파이프를 즐겨 사용하던 한 아버지의 유품.

고객과 대면해 표구할 물건을 앞에 두고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모리함 작업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작업의 성격상 내밀한 기억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단골손님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물건을 표구했던 손님이 출산하고 아이의 물건을 의뢰하는 식으로 긴 호흡의 생애 주기를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SNS를 통해 모리함을 접한 20~30대 젊은 손님도 있지만, 나이가 지긋한 손님도 많아요. 부모님 세대는 표구가 익숙하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가 담긴 물건을 많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 함께한 이후엔 모리함을 꾸준히 찾아주시는 편이에요. 더 많은 분에게 모리함의 작업을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올해는 롯데백화점과도 제휴를 맺었어요. 롯데백화점 VIP 고객들에게 어떤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 모리함의 방식대로 손님과 일대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액자에 담아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래서 바우처 형태의 에비뉴엘 포인트를 통해 모리함과 작업을 진행해보실 수 있도록 했죠.”
명동에 위치한 모리함 사옥에는 모리함의 작업이 이뤄지는 공방과 모리함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함께 마련되어 있다. 1층의 작업 공간에는 최나영 대표 어머니의 결혼사진과 진주 목걸이를 함께 표구한 작품이 걸려 있다. 어머니의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순간을 담은 이 액자는 모리함의 시작점이 된 작품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지인들이 제 앞에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슬펐어요.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해서인지 자꾸만 엄마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엄마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엄마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엄마와의 추억을 간직할 방법을 찾다가 자연스레 표구 작업에 이르게 됐죠.” 최나영 대표는 모리함 전시관에서 어머니를 추모하는 새로운 형태의 장례식을 치렀고, 이 경험을 모리함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소개했다. “친구 부모님의 상이 치러질 때, 영정 사진으로 처음 뵙는 경우가 많잖아요. 형식적으로 절하고 식사하는 대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건강하게 애도할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모리함의 전시가 그런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모리함 전시관은 장례뿐 아니라 고희, 팔순, 결혼, 돌잔치 등 생애 주기에 따른 다양한 의례를 의미 있게 치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이를테면 고희를 기념해 부모님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사진, 추억의 물건 등을 전시하고 가족·친지들과 음식을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한테 항상 관심이 많잖아요. 밥은 먹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자식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말도 많이 거는데, 자식들은 부모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지 않는 것 같아요. 부모님 삶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 전시를 준비하는 일 자체가 부모님 생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과정이 되더라고요.” 지금 모리함 전시관에는 온양민속박물관의 상임 고문이자 제3대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신탁근 위원장의 액자와 함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지는 살아 숨 쉬는 유물’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우리 삶 속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물건은 유물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를 알아보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ditor
KIM JISEON
Photographer
LEE HYUNSE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