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도시의 은신처
건축가 유현준의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에 대한 탐구.
많은 사람에게 유현준은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친근하게 건축 이야기를 하던 건축가이자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공간의 미래> 등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다. 그동안 그는 글과 말을 통해 세상의 많은 일이 건축 언어로 설명될 수 있으며, 건축을 매개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유현준은 주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건축에 대해 말한다.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의 아이들이 10여 년 동안 생활하는 학교라는 공간이 교도소와 같은 구조를 갖췄다고 지적하며 아이들의 빛나는 창의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다양한 형태의 학교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깨우는 식이다. 그가 던지는 여러 가지 화두는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시작해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또한 그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바쁜 건축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하늘이 열려 있는 테라스, 개인적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복지회관 목욕탕, 함께 앉거나 따로 앉을 수 있는 벤치, 휴식처를 제공하는 숲속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고창의 도서관 등 유현준의 건축 세계를 들여다보면 공적 공간 속 사적 공간, 혹은 사적 공간 속 공적 공간에 대한 고민이 핵심적으로 여겨진다. 그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은신처를 제안하고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시환경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발언하는 사람이다. 논현동에 위치한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옥상에 만든 개인 공간에서 건축가 유현준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쪽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옥상에 지은 유현준 건축가의 개인 공간. ⓒShin Kyungsu
도심 한복판에 있는 사무 공간 위에 이런 개인 공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 공간에서는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
A 누워서 쉴 때도 있고, 책을 읽거나 쓰기도 한다. 창 앞에 작게나마 수공간을 만들어뒀더니 까치 같은 새들도 자주 찾아온다. 일부러 가꾸지 않고 내버려둔 잔디에서는 여러 식물이 영역 확장을 하며 바둑을 두는 것처럼 위치를 바꾼다. 의자에 앉아서 그런 풍경을 보며 멍 때리는 시간이 많다.
유현준 교수의 글을 통해 건축과 도시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람이 많은데, 본인에게는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나?
A 글쓰기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물론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분들에게는 글쓰기가 스트레스겠지만, 나는 본업인 건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건축은 건축주나 예산, 관청의 허가 문제 등의 제약으로 내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 글쓰기는 누군가를 설득하지 않고 예산의 제약 없이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니 가끔은 도피처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글쓰기가 괴롭지 않은 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한 습관이 있나?
A 건축 자체가 너무 많은 사람들과 스파링하는 개념이다 보니 외부 자극으로 인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나는 일상의 모든 경험을 건축과 연결해 생각해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때 마주한 좋은 경험을 설계에 연결 지어본다.
공간에 대해 가장 창의적인 시기는 앞으로 생길 나만의 공간을 이리저리 구상해보는 어린 시절이 아닐까 싶다. “공간은 실질적 물리량이 아닌 기억의 총합”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에 대해 어떤 기억이 있나?
A 공간적으로는 단층짜리 조그마한 집에서 살다가 2층으로 이사 가기도 하고, 아파트에 살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 가족 구성원의 관계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고부 갈등이 있는 집의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부부와 한 명의 자녀가 사는 집이 3차 방정식이라면 시부모가 함께 사는 집은 5차 방정식쯤 될 것이다. 그런 복잡한 관계를 옆에서 관찰한 경험이 건축 일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아파트에 사는데, 한국 아파트에서는 공간적인 해법을 찾기 어렵다. 그동안 아파트의 획일화, 그로 인한 가치관의 정량화를 한국 사회문제로 지적해왔는데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A 하늘이 열려 있는 넓은 발코니나 한옥처럼 방에서 방을 볼 수 있는 창문을 많이 만드는 것 등이 내가 제안해온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아파트 발코니의 문제점은 폭이 1.5m 정도로 좁다는 것과 윗집 발코니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설계한 아파트는 그 두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폭이 넓은 발코니를 만들었고, 윗집 발코니가 하늘을 가리지 않아 발코니에 서서 비를 맞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우리나라 아파트 특징이 세대 수가 많지 않나. 엄청나게 동 수가 많은데, 여러 건축가가 참여해 스머프 마을처럼 각 동이 각기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면 재미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적도 있다.
당신이 도심에 지은 건축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공간이 발코니인 것 같다. 주거 공간 이외에 사무 공간에서 발코니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A 지금 짓고 있는 오피스 빌딩의 발코니를 테트리스처럼 구성해 서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볼 수 있는 형태로 설계했다. 주택의 발코니에서는 누가 나를 보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사무 공간의 발코니는 좀 더 적극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이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발코니는 건물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서울의 빌딩은 안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코니를 통해 서로 마주 보는 관계를 만든다면 의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열려 있는 공간을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MBTI에서 사람을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것처럼, 건축가로서 여러 성격을 지닌 공간들을 선택지로 제시하고 싶다.
반대로 신안 압해읍에 세운 복지회관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는 건축물이다. 이 공간을 설계하며 가장 신경 쓴 점은 무엇인가?
A 예전에 공주시에서 마을회관을 지은 적이 있는데, 지극히 도시인의 시선으로 물이 채워져서 호수 같기도 하고 물결의 일렁임으로 바람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하는 논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벼가 자라는 모습도 보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마을회관의 창문을 논을 바라볼 수 있게 냈는데, 몇 개월 후에 가니까 마을회관을 사용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창문에 트레이싱페이퍼를 붙여놓았더라. 이유를 물어보니 쉬는 공간에서도 일터를 보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압해읍 복지회관은 창문을 극도로 줄이고 벽을 만들어 내부 지향적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공용 목욕탕이 있는데, 온수가 잘 나오지 않는 섬에 사는 주민들에게 목욕탕은 공동체의 중심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내밀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방 공공건축은 기획 과정에서 공을 들여 삶의 방식을 바꾸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재 짓고 있는 고창도서관에서는 어떤 경험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거대한 나무 같은 도서관의 설계가 근사해 완공되면 꼭 한번 들러보고 싶은 공간이다.
A 단일 목구조로 만든 종묘에서 착안한 고창도서관은 종묘와 비슷한 길이인 100m의 현대식 목구조로 만들어진다. 오랜 프로젝트였는데, 올겨울에 마침내 완공될 예정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건물이 대부분 평평한 천장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생활한다. 이 도서관에서만큼은 숲속 나무 밑에서 책을 읽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에서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처럼 구조를 만들고 가운데 책꽂이를 배치해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또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마치 큰 나무에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유튜브 ‘셜록현준’에서 최근에 지은 제주도의 1층 단독 건물을 소개했다. “유현준이라는 사람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설명한 이곳은 어떤 공간인가?
A 200평 대지에 40평 건물을 세울 때 보통 직사각형의 단순한 구조를 떠올린다면, 이곳은 되도록 다양한 자연의 얼굴과 만날 수 있게 하고 싶어서 불규칙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방에서 다양한 모양의 정원을 볼 수 있고, 몇 발자국만 걸어도 자연과 햇빛을 만날 수 있다. 보통은 건축주의 생각을 듣거나 그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건물을 만드는데, 이번 경우는 내가 건축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려 했는데, 다 만들고 나니 빨리 매각하고 그 돈으로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항상 재작년에 한 설계보다 작년에 한 설계가 마음에 들고,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제일 즐겁다.
위쪽 중정의 수공간이 인상적인 신안 압해읍 복지회관. ⓒPark Youngchae
아래쪽 테트리스 형태의 발코니를 구상한 오피스 빌딩. ⓒHyunjoon Yoo Architects
그래서인지 굉장히 많은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것 같다.
A 사이즈와 상관없이 현재 공사 중인 프로젝트가 17개 정도 된다. 이제 분기별로 그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직업이 좋은 게, 끝이라는 게 없다. 시간을 더 들이고 고민을 많이 할수록 좋은 작품이 나오기에 도를 닦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최근에는 유튜브에서 젊은 친구들의 자취방 가구 배치를 돕는 일을 했는데, 작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척박한 주거 환경에서 사는 젊은이들을 향해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 중심의 네트워크가 완성되고 촘촘하게 분포된 매력적인 ‘공짜’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건축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공짜 공간은 어디인가?
A 수공간을 좋아해서 한강시민공원에 자주 간다. 건너편 풍경이나 하늘을 반사시키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물을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도산공원처럼 도심과 가까이 있는 공원이나 경의선 숲길처럼 선형으로 되어 있는 공원도 좋아한다. 오로지 자연만 있는 등산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도시 생활과 자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서울에 살 것 같다.
사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애정이 많은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좋은 소리든 나쁜 소리든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럼에도 발언을 하면 감수해야 할 일이 생기는데, 계속해서 글과 말을 통해 더 나은 도시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건축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시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현실화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아이디어의 씨앗이라도 말로 내뱉거나 글로 남기면 다른 건축가나 행정가 등의 토양을 만나 어떤 식으로든 싹을 틔울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벤치에 대해 쓴 글을 통해 강남구의 ‘세상의 모든 벤치’라는 프로젝트가 현실화되기도 했다. 지금도 나의 책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벤치를 놓는 프로젝트 제안이 종종 들어온다. 그런 것이 나에게는 씨앗이 싹을 틔운 것처럼 굉장히 기쁜 사건이다.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사무실 외관에도 ‘시민을 위한 의자’가 있다. 그 의자는 건축가의 의도대로 사용되고 있나?
A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앉는다. 주로 배달하는 분들이 많이 찾고, 노인분들이 언덕길을 오르기 전에 쉬어 가는 용도로 사용하신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익을 보려면 다른 이가 손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것을 내어주면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받을 수도 있는 게 장사의 기본 아닌가. 우리는 장사의 역사가 짧고 농사의 역사가 길기에 내 땅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땅따먹기 마인드로만 경제를 본다. 그러나 나는 물물교환처럼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례를 건축에 적용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기반으로 일하는 것은 건축가에게 제약인가, 기회인가?
A 둘 다이다. 제약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사회이기 때문에 당위성을 가지는 건축, 그러니까 힘을 가지는 건축을 할 수 있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에서 빌라 사보아, 롱샹 성당 등 세계 곳곳의 유수 건축물을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 의미가 큰 건축물을 하나만 꼽는다면?
A 하나만 꼽긴 어렵지만, 라 투레트 수도원인 것 같다. 책에 “라 투레트 수도원은 20세기 현대건축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디자인 전략과 전술이 집대성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고 썼는데, 처음에 봤을 때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 건축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고, 20세기의 건축은 결국 르 코르뷔지에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준 건축가는 누구인가?
A 안도 다다오와 루이스 칸에게서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요즘도 설계가 잘 안 풀리면 안도 다다오의 도면을 본다. 그의 작품은 여러 명이 보러 갔을 때보다 혼자 갔을 때 가장 좋은데, 빈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고, 나와 관계를 맺는 느낌이 든다. 이들은 콘크리트를 사용해 건물을 짓지만, 건물 그 자체보다는 건물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 어떤 영적인 각성을 주는 빈 공간을 만드는 게 주목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 건축가인가?
A 나는 빈 공간 자체보다 공간이 만들어내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우주 공간도 사람이 쳐다보고 무언가를 느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게 건축이 가지는 묘미다. 엄청나게 형이상학적인 걸 만드는 듯하면서도 엄청나게 형이하학적인 물질을 다루고, 그 안에 인간이 항상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건축이 재밌다.
스머프 마을처럼 각기 다른 형태의 학교 건물을 구상한 화성의 송산중학교. ⓒShin Kyungsub
Editor
KIM JISEON
Photographer
LEE JA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