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여자와 나이

은발의 여인들이 패션계 최전방에 등장했다. 그 사건이 남긴 깊거나 혹은 얕은 생각들.

버버리 노먼 카페 팝업 스토어에 등장한 88세의 케이크 장인 메리 베리.

생 로랑 광고를 통해 여전한 아우라를 뽐낸 카트린 드뇌브.

자그마한 체구에 은빛 머리를 곱게 쓸어 넘긴 88세의 매기 스미스가 로에베의 광고 비주얼 모델로 등장했다. 현란한 SNS의 전개 속에서도, 불꽃 튀는 비주얼의 각축장인 잡지 속에서도 매기 스미스의 사진 한 컷은 묘하게 눈길을 끈다. 그 생경함에 초속 단위로 움직이던 손가락과 눈이 멈춘다. 그리고 이 낯섦은 곧 신선함으로 연결된다. 이어 로에베라는 브랜드의 선택에 묘한 감동마저 느낀다. 최근 77세에 마시모두띠 캠페인을 찍은 샬럿 램플링부터 버버리 노먼 카페 캠페인에는 88세의 케이크 장인 메리 베리와 86세의 한국 배우 김영옥이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3년 전 77세의 카트린 드뇌브가 출연한 생 로랑의 광고 역시 낯설고도 아름답고, 81세의 나이로 지난해 5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커버 모델이 된 마사 스튜어트는 놀랍기마저 하다. 물론 은발 여인들이 이런 ‘이벤트성’으로 광고에 등장한 게 처음은 아니다. 가장 명확하고 도발적으로 80세 모델을 기용한 건 2015년 셀린느였다. 조앤 디디온의 현재를 보여준 광고는 우리나라에 조앤 디디온이란 사람을 알린 최대의(!) 사건이었다. 80세 여인들이, 그것도 늙어간다는 것에 히스테리적 반감을 가진 패션계에서, 심지어 그들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캠페인에 등장한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해 한 영국 기사는 고령화 사회로 가는 지금(영국은 2043년 전체 인구의 24%가 65세 이상이 될 거라고 예측한다) 80세 이상의 모델이 등장하는 건 반가운 일이라고 했다. 또 한쪽에선 이 모든 인물 대부분이 백인 여성이란 점에서 이 또한 다양성의 한계라고 지적하며 오히려 이들처럼 아름답게 늙어가지 못한 여자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했다. 물론 이 케케묵은 이야기는 2015년 조앤 디디온이 셀린느 광고에 등장했을 때부터 벌어진 격론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의 나이, 좀 더 정확히는 나이가 많은 여자가 등장하는 광고는 이슈를 만든다. 어차피 광고의 목적은 하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띌 것! ‘거기에 여자의 나이가 이용된다는 게 조금 슬프다’가 이 광고를 보는 두 번째 마음이다.

로에베의 광고 비주얼을 빛낸 88세의 매기 스미스.

발렌시아가의 앰배서더로 이름을 올린 배우 니콜 키드먼.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나온 남궁선 영화감독이 ‘여자와 나이’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성으로서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하려면 세 가지 길밖에 없는 것 같다. 1번 저평가, 2번 소멸, 3번 파멸.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여자(Promising Young Woman)와 재주 많은 늙은 여자(Accomplished Old Woman) 사이에 중간이 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며 기성 사회가 하는 작은 선택들이 중간을 비워내고 있고, 그 시간의 여자들은 투명하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예시로 든 사람이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다. 프렌치 뉴웨이브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신예로 등장한 이후 엄청난 능력치를 보여줬으나 중간은 텅 비고, 87세 즈음 칸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남궁선 감독은 이처럼 차라리 저평가를 받더라도 파멸과 소멸하지 않으면, 그래서 오래 살면 80세가 넘은 여인에게 명예상이라도 주지 않냐는 농담 섞인 푸념을 했다. 그 덕분에 칸영화제 포스터로 쓰이기도 했던 아녜스 바르다가 26세에 남성 스태프 등 위에 올라가 카메라를 잡고 있던 모습을 뛰어넘어 87세에 커트 머리로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을 기억하게 됐다는 점이 기쁘면서도 씁쓸하다. 분명 그사이 아녜스 바르다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을 텐데 세상은 주목하지 않았다. 조앤 디디온도 마찬가지다. 맨발에 롱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던 지식인 모습을 한 조앤 디디온의 모습은 바로 80대의 나이 든 여인으로 점핑한다. 그의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었지만, 우린 대부분 중간 시절의 그를 지워냈다.

시크한 모습이 인상적인 마시모두띠 캠페인의 샬럿 램플링.

버버리 노먼 카페 팝업 스토어에 등장한 86세 배우 김영옥.

그래서 매기 스미스의 광고를 보며 드는 세 번째 감정은 ‘그때 그곳에 있었지만 없었던 여성’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55세, 66세의 매기 스미스는 아마도 그냥 버텼을 것이다. 젊은 신예 여성과 재주 많은 나이 든 여성 사이에 그 투명함을 버텨내는 게 여자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그래서 은발 배우의 등장보다 오히려 박수 쳐 반기고 싶은 건 양자경과 니콜 키드먼, 혹은 다시 돌아온 1990년대 슈퍼 모델들의 등장이다. 최근 발렌시아가는 양자경과 니콜 키드먼을 앰배서더로 임명했으며, 랄프 로렌의 크리스티 털링턴, 베르사체의 클라우디아 시퍼, 맥퀸의 나오미 캠벨 등 2024 S/S 컬렉션의 많은 무대 위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90년대 슈퍼 모델들의 활기찬 런웨이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80년대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90년대 트렌드를 이벤트성으로 이용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56세의 양자경은 2023년 칸영화제 우먼 인 모션(Women in Motion)상을 수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계속 싸워요. 계속 밀어붙이세요. 계속 이야기하세요. 여러분의 목소리도 중요하고, 여러분의 비전도 중요합니다. 저는 이 무대에 혼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곳에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해지는 그 나이대의 여자들에게 외치는 말이다. 누가 뭐라 하든 계속 내가 여기 있음을 소리쳐야 한다.
여성에게 나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머리 아프고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문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 주제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해나 싶기도 하다. 그저 불안감을 조장하는 현대사회의 덫일 뿐인데 말이다. 우리는 매일 늙어가는 과정 속에 있고, 그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삶의 순서다. 그저 그사이의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함께 서 있는 또 다른 여성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면 될 뿐. 나이에 대한 불안이 내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온 것임을 공유할 때 나이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저 광고들을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발렌시아가의 앰배서더로 이름을 올린 배우 양자경.

Contributing Editor
KIM MINJ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