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기억해야 할 여성들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지닌 존재다

헬레나 파라다 김의 포트레이트.

Helena Parada Kim, ‘Madonna del Parto’, 2021, oil on linen, 170×130cm 2021년 쾰른의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열린 헬레나 파라다 김의 전시 설치 전경. Courtesy of Choi&Choi Gallery

Helena Parada Kim, ‘Nurses and Cranes’, 2017, oil on linen, 180×250cm Courtesy of Choi&Choi Gallery

Helena Parada Kim, ‘Wood Sorrel’, 2022, oil on linen, 50×40cm Courtesy of Choi&Choi Gallery

헬레나 파라다 김은 아름다운 회화 작품을 통해 개개인의 섬세하고 복잡한 정체성에 접근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헌신
지금 쾰른의 동아시아 미술관에는 헬레나 파라다 김(Helena Parada Kim)의 인상적인 한복 초상화와 정물화가 펼쳐져 있다. 헬레나 파라다 김은 한국의 전통문화, 음식, 식물과 자연 등을 회화의 소재로 삼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인 한복이나 제사상의 형상이 헬레나 파라다 김의 작품 속에서 비전형적이고 신비로운 아우라를 드러낸다. 공허한 듯하면서도 창조적인 영감을 주는 그의 작품은 시선을 잡아끌며 관객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게 한다.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영국 화가 피터 도이그의 사사를 받아 회화를 전공한 헬레나 파라다 김의 작품은 유럽의 고전 작품 같은 깊이와 광택을 지녔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서양의 고전 회화를 결합한 작품은 한국과 스페인계 출신인 헬레나 파라다 김의 성장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 방식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경험한 다문화적 환경과 가족의 역사,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1960년대에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옛 앨범에서 본 여성들의 우아하고 강인한 모습에서 영감받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헬레나 파라다 김의 작품은 곧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작가 개인의 증언이다. 또한 인간과 자연이 품은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한 예술가의 열정을 담고 있다.

당신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한복 작품은 의복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서사를 품은 매체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한복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복 그림 시리즈를 시작했어요. 당시 저는 초상화 장르에 대한 저의 접근 방식과 서사적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어요. 구상화를 통해 무언가에 대해서, 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죠. 그러다 1960년대에 독일로 이주할 때 어머니와 이모, 어머니 친구들이 가져왔던 한복을 빌려 한복 작업을 하게 됐어요.
한복 초상화에서 인물들의 얼굴을 흐릿하게 처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제가 그린 첫 번째 한복은 단순한 철사 옷걸이와 함께 벽에 걸려 있었어요. 그 옷에 생명력을 채우려면 사람이 입고 있어야 했죠. 저는 어머니와 이모에게 모델이 되어줄 수 있는지 물었어요. 그러나 인물의 자세와 한복의 물성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생략하거나 힌트만 주기로 결정했어요. 이 작업을 통해 한국인 이주노동자의 딸이라는 저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됐어요.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많은 여성들처럼 저의 어머니와 이모도 한국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1960년대에 독일 쾰른을 찾았어요. 당시 이들은 부산의 몇몇 동네 외에 다른 곳을 여행한 적이 없었다고 해요. 그들이 독일이란 나라에 처음 왔을 때 달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예요. 그들이 가지고 온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한복이었어요.
우연히 본 어머니의 옛 앨범 속 파독 간호사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과 관련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본 사진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A 여러 장의 사진을 발견했는데, 어머니를 포함한 사진 속 여성들의 우아함과 단정함에 매료되었어요. 그들은 일할 때는 간호복을 입었지만, 여가 시간에는 핸드백과 모자를 착용하는 등 매우 세련된 의상을 입고 있었어요. 그 여성들은 서양 패션을 좇았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표현했어요. 그들의 롤 모델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이스 켈리였던 것 같아요. 또한 사진만 보아도 그들 사이의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여성들끼리의 우정은 독일에서의 힘든 삶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작업 과정을 통해 가족의 역사나 1960년대 한국 사회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인가요?
A 어머니는 1945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어요. 그녀가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 해요. 할머니는 항상 저 멀리 수평선에 떨어지는 폭탄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후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했고, 종전 이후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아프셨고, 어머니와 이모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러다 선교 활동을 하며 주민들에게 일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독일인 신부를 만났고, 가톨릭 세례를 받은 후 독일로 갈 기회를 얻은 거죠. 당시 저희 어머니는 고작 18세였다고 해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독일로 떠나는 데 동의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두 형제가 가는 길은 호랑이도 막을 수 없다”라는 한국 속담을 인용하셨다고 해요.
1960년대를 살아가던 강인한 여성들에게서 받은 삶에 대한 영감이 있나요?
A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는 이타적인 동기를 갖고 독일에 왔고, 그로 인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했죠.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신앙과 쾰른 한인 여성들의 연대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직장이던 양로원에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들은 서로 강하게 이끌렸지만, 70년대에 그들의 초국적 결혼은 작은 스캔들이었다고 해요. 부모님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제 삶은 훨씬 평범하고 쉬웠으며 또한 이기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용기에 늘 감탄하고, 그들이 평생 헌신했던 인도적 가치에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상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담은 정물 시리즈도 인상적인데, 이러한 전통문화에서 흥미롭게 여긴 지점은 무엇인가요?
A 한국의 유교와 무속, 그로부터 영향받은 장례 의식은 저를 항상 매료시켰습니다. 한 사회가 망자를 대하는 방식은 그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서구 문명에서는 음식과 죽음, 조상을 연관 지어 애도하는 의식이 또렷하지 않죠. 저의 정물화는 한국 문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작업입니다.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엄숙하게 침묵하고, 명상적인 공기 속에서 준비된 음식을 스페인 바로크 양식의 정물화로 구현합니다.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영국 화가 피터 도이그의 사사를 받아 회화를 전공했습니다. 피터 도이그에게 어떤 지도를 받았나요?
A 피터 도이그는 다양한 매체와 여러 입장을 포용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함께 그림을 그린 시간은 결코 기술에 국한된 경험이 아니었어요. 그의 수업은 오늘날의 예술과 회화라는 장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하게 했어요. 이 시간들을 통해 회화적 서사의 가능성과 작품과 관객의 연결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또한 피터 도이그는 제가 고전적인 초상화 장르를 뛰어넘어 한 개인의 정체성과 유산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도록 독려했어요.
당신의 작품은 유럽의 고풍스러운 고전 회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업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예술가가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저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벨라스케스를 포함한 유럽 옛 거장들의 작품에 감명받았어요. 카라바조, 티치아노, 19세기의 마네, 드가 등 다수의 예술가, 20세기의 예술가로는 루치안 프로이트와 호크니의 작품을 좋아해요. 그 밖에도 17세기의 플랑드르 정물화 등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당신이 지닌 미감과 철학의 뿌리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저에게 화가로서의 철학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로서 창의적인 여정의 시작점에 서 있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림 자체가 사고의 한 형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복 작품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미감에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림 안에 떠도는 공허함은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반면 저의 식물 그림과 정물화는 유럽 고전 회화의 영향을 받았어요. 배경을 어둡고 불투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선호해요. 작품 속에서 묘사된 사물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요. 그렇게 완성된 정물화는 무거움, 화려함, 무한함을 품게 되죠.
식물을 관찰하고 캔버스에 담기 시작한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A 몇 년 동안 정원 가꾸기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었어요.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법과 겸손함을 가르쳐주는 원예는 그림만큼이나 저에게 중요한 작업이에요. 지구와 유기체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죠. 그저 화가로서 제가 좋아하는 것을 그린 것이 식물 그림의 출발점이었어요. 어느 때보다 기후변화로 위협받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취약성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해요. 저의 모든 작품에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단상이 담겨 있어요. “당신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유럽 미술사에서 늘 중요한 주제였죠.
쾰른의 동아시아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의 제목 ‘사이 공간(Interstices)’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A 제가 생각하는 ‘사이 공간’은 전환의 장소, 틈, 정의되지 않은 공간, 그래서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전기적 관점에서 이 제목을 해석한다면, 이 공간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다국적, 다문화적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서양의 고전 회화와 결합하는 저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근에 몰입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A 양치식물 시리즈를 작업하고 있어요. 원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대신 특이한 형태로 눈에 띄는 산림 식물을 좋아했어요. 이번 작업에서는 수중식물처럼 초현실적으로 보이게끔 양치식물의 색과 빛을 변경했어요. 색상을 바꾸고 나뭇잎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더했더니 그림에 초현실적이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러났어요. 저에게는 이 지점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갈라 포라스-김은 국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을 통해 당연하게 믿어온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익숙함으로부터의 해방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4개의 화폭에 세밀하게 그린 국보 530점이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서 있다. 남한과 북한의 국보 유적을 한데 모아 등재 순서대로 나란히 볼 수 있게 그린 드로잉이다. 그림은 하나였다 흩어진 시간에 관해, 선택되거나 탈락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빼곡했다가 듬성해지는 그림이 품은 리듬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주체들이 유물을 분류하고 관리해온 체계를 보여주며 국보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인 어머니와 콜롬비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습득한 기관이 이를 보존하는 법, 작품을 연출하는 방식을 조명하며 이들이 당연하게 고수해온 방식에 새로운 제안을 건넨다. 보존 영역에 있는 것들과 무형의 유산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그녀의 작업은 흡사 역사학자의 연구와 닮아 있다. 단지 기록하는 방식이 글이 아닌 드로잉이나 조각일 뿐 작가가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은 세심한 역사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이런 그녀의 작업을 누군가는 불편하게 여기고 누군가는 신선하게 느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2023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 4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전시 중인 그녀는 새로 작업한 커미션 작업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에서 고인돌을 바라보는 세 가지 주체의 시선을 화폭에 담았다. 고인돌의 주인인 관 속 죽은 자의 시선과 외부에서 문화유산으로 고인돌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이끼 낀 돌이 되어가는 자연의 시선. 갈라 포라스-김의 작업에는 고대인의 소망을 현대에서도 지켜줄 방도를 모색하는 존중과 낭만이 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습기, 작품과 함께 사는 곰팡이, 미술관에 떠돌던 먼지 등 존재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이들을 낯선 방식으로 드러내는 등 대상의 존재 이유를 시각화해 이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지난 2월 로스앤젤레스 칼아츠 센터(REDCAT)에서 진행했던 전시 <TheFeminist Art Program(1970-1975): Cycles of Collectivity>는 1970년대 여성 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우먼하우스’를 조직하고 미술계에서 혁신적인 여성주의 활동을 해온 주디 시카고와 미리엄 샤피로의 아카이브를 선보였다. 이 전시의 일환으로 갈라 포라스-김은 당시 샤피로가 진행한 ‘여성 예술가를 위한 편지(Letters to Young Women Artist)’의 맥을 잇는 ‘더 많은 여성 예술가를 위한 편지(More Letters to Young Women Artist)’ 작업에 참여했다. 작가는 이 편지에 대한 소개글에서 많은 여성 예술가가 존재했음에도 기록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우며 “익명이었던 여성은 더 이상 익명일 필요가 없다(ANONYMOUS WAS A WOMAN, she need no longer be)”라고 일갈한다. 이는 비단 여성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모든 작업 대상에게 전하는 전언과도 같다. 제작 의도와는 다르게 옮겨지거나 박제된 존재들,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탈락되어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들. 이들에 주목하는 갈라 포라스-김의 작업은 과거를 연구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열망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로잉은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상을 픽셀 단위로 쪼개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나요? 이런 드로잉 작업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드로잉을 하는 중에는 그리는 대상이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것이 현대에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심지어 어떻게 문서화됐는지에 대한 것들을 알아가는 작업이죠. 유물이 엑셀로 작업된 형태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이쪽이 제가 이들을 이해하기 훨씬 쉬운 방법이에요.
한국인 어머니와 콜롬비아인 아버지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자랐고, 현재 잉글랜드에 살며 LA를 오가는 삶을 살고 있어요. 경계를 넘나드는 일상의 경험이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A 우리 몸은 일반적으로는 (국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분류되죠. 삶에서 자연스럽게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은 저로 하여금 분류 체계와 집단화에 대해 고민하게 해요. 작업을 하면서도 저는 다양한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제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함과 동시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분류하는 방식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어머니의 나라이자 당신의 뿌리 일부이기도 한 한국의 역사를 유물로 접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남다를 듯합니다. 이런 작업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요?
A 한국에서 실제로 자란 적이 없어 한국의 문화적 역사에 대해 깊이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과 관련해 배우고 싶은 것들에 대해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특히 북한의 유물은 매우 생소했기 때문에 이러한 보물들을 연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고인돌을 다룬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 작업을 위해 고창에 갔더니 테마파크 수준으로 관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놀란 점은 이를 묘지로 사용했던 사람들의 후손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이었어요. 고인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묘지라는 걸 느낀 거죠. 이처럼 제 몸도 여러 하위 카테고리에 속해왔습니다. 이들이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주는 각기 다른 버전이라 생각해요.
당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A 유물을 대하는 현대적 동기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현재 당연하게 이뤄지는 보존 방법이 자연적인 부패 과정과 어떻게 대립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또 이에 따른 기관의 분류 체계가 소장품을 이해하는 방식을 어떻게 제한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여러 기관과 협력하며 가끔 허를 찌르는 제안도 하는데요, 당신의 제안과 작업을 통해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끼나요?
A 제 작업은 역사적 유물, 자료를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제안이자 제시 정도예요. 실제로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문제가 있는 업무 관행을 이어왔기 때문에 제가 짚어내는 문제의 많은 부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관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구성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들이 단지 과거의 방법론에 너무 얽매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MMCA ‘올해의 작가상’ 심사위원과의 대화에서 “내가 죽은 후 작품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미래 세대에 당신의 작품에 대한 관리법을 남긴다면 어떤 가이드를 주고 싶나요?
A 작업을 하면서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중입니다. 미래가 어떤 상황일지 모르기에 미래 사람들을 설득해 제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과거를 많이 살펴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앞으로 더 나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죠.
1974년 있었던 ‘젊은 여성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소환해 ‘젊은 여성 예술가에게 보내는 더 많은 편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프로젝트를 하게 된 계기와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 130일 동안 진행되는 여성주의 예술 프로그램 아카이브 전시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카탈로그 작업입니다. ‘젊은 여성 예술가에게 보내는 더 많은 편지’를 통해 발견된 현대의 편지들은 여전히 분야 내의 불평등 문제가 많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어요.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을 꾸리는 일과 자신의 커리어를 양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반면 더 많은 기회와 고려 사항이 생겼으며 여전히 많은 연대가 있다는 점도 발견했죠. 우리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편지에서 당신은 “우리가 무한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이제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여성 예술가로서 작업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여성이라는 성별이 당신의 예술 작업과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A 종종 연배가 있는 남성 예술가들 그룹에서 여전히 배척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이 제가 더 나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동력일 거예요. 그래서 적어도 작품만큼은 내 몸으로부터 오는 설정이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죠. ‘젊은 여성 예술가에게 보내는 더 많은 편지’에 쓴 것처럼 항상 호기심을 가지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무언가가 정해진 것처럼 느껴질 때 “누구, 무엇, 언제, 어디서, 왜”라고 한 번 더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죠. ‘당연한’ 답이 있어도 잠시 미뤄두고요.
당신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여성은 누구인가요?
A 너무 많아요! 개념미술가 테레사 마골레스, 스페인 식민시대의 멕시코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수녀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즈, 독일 중세시대 수녀이자 신학계에서 여성 최초로 인정받은 힐데가르트 폰 빙겐 등이 생각나네요.
작품 활동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A 연구 끝에 마침내 작품의 성격과 관객이 어떻게 느끼길 원하는지를 고려해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의 구조를 찾았을 때 희열을 느낍니다. 고민 끝에 제목을 완성했을 때와 작업을 시작한 지 약 4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의 리듬이 조화롭게 흐를 때도 기분이 좋아요. 관객이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도 작품 활동의 기쁨 중 하나죠.
당신의 작업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찾아 의문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현재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연구와 작업을 할 계획인가요?
A 현재는 (미술관, 박물관 등의 기관에서) 기후를 제어하는 것과 기관의 창문에 관심이 많아요. 유리와 열 스트레스, 자외선 코팅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죠.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기존 카탈로그를 확장해 정보를 정리하는 새로운 형태와 다양한 분류법을 포함하는 프로젝트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소장품이 역사적 형태를 넘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다영(프리랜스 에디터)

그레이스 M. 조는 어머니의 사적인 역사와 한국의 공적인 역사를 연결하며 슬픔에서 시작되는 연대를 꿈꾼다.

슬픔의 공동체
사회학자 그레이스 M. 조(Grace M. Cho)가 어머니의 삶을 기록한 회고록 <전쟁 같은 맛>에 등장하는 ‘군자’는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다. 한인 이민 1세대로 1970년대에 워싱턴주 셔헤일리스에 정착한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친화력, 노련한 정치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선원이던 남편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일상적 차별이 만연한 타국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가장 인상적인 재능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그녀는 “한 번 주면 정 없다”라거나 “아이구, 답답으라(속상해라)” 같은 말을 연신 읊조리며 자신처럼 이국 땅에 떨어진 한국인을 비롯해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과 정을 나눈다. 그러나 활기차고 당당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그레이스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자취를 감췄다.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며 외부 세계를 단절하고 집에 틀어박힌 어머니는 조현병이라는 병명을 받았고 2008년에 결국 물리적 죽음을 맞이했다. 학자가 된 그레이스는 어머니의 사적인 역사와 한국의 공적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어머니가 1960년대 한국전쟁 당시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사실과 당시 기지촌 여성들이 ‘양공주’라 불리며 사회적으로 멸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딸에게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전쟁 같은 맛>에는 “선택지가 아무리 제한되어 있어도 저항의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생존과 저항을 위한 도구가 ‘일’이었고, 미국으로 이민 온 어머니에게는 ‘음식’이었다면 그레이스에겐 ‘글쓰기’와 ‘사랑’이다. 여전히 어머니의 삶과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고 글쓰기를 통해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그레이스는 슬픔이야말로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고, 폭력과 불의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전쟁 같은 맛>에는 김치, 고등어조림, 콩국, 미숫가루 등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여러 한국 음식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이 가장 각별하게 생각하는 한국 음식은 무엇인가요?
A 고민할 필요도 없이 생태찌개예요. 어머니가 생태찌개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었어요. 어머니는 40년 만에 이 음식을 맛보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하셨어요. 그 순간 제가 물질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식의 형태를 띤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무엇보다 생태찌개는 정말 맛있잖아요. 이 특별한 맛을 지키기 위해 매년 어머니의 기일에만 생태찌개를 만들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음식을 통해 이민자와 가족을 보살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전 세계 대부분의 여성들이 수행하는 돌봄 노동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이 업무를 어떤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습니까?
A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돌봄 노동이 상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사 노동이나 간병이 여성의 일로 본질화되는 것을 우려합니다. 엄마와 아이들을 돌보며 제가 선택한 절충안은 양보다 질을 생각하자는 거였어요. 내가 원했던 것만큼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지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특별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어떤 어머니인가요?
A 엄마는 강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저는 엄마의 성격 중 일부를 확실히 물려받았어요. 그러나 부모님이 저에게 다르게 하셨다면 좋았을 일들로부터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경쟁력을 갖추도록 독려받으며 자랐어요. 그러나 현재의 저는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무엇이 나 자신을 독특하게 만드는지 발견하고 그 자질을 소중하게 키우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경쟁보다 협력을 강조하고, 성취보다 친절함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정직함과 개방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저의 원가족처럼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우리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무겁고 어려운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불편한 감정을 함께 극복하고, 결코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로서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당신의 작업과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A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대감이 있었어요. 내가 열한 살 무렵에 아버지는 반년 동안 바다에 나가 있었고 오빠도 집을 나가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엄마와 둘만 있었어요. 할머니와 이모와 함께 1년 동안 살았던 것도 이 무렵이었어요. 이때의 기억이 또렷해서 제 삶에는 어머니상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여성들이 겪는 불의와 여성들이 가진 힘과 사랑을 배웠어요. 저는 엄마, 이모, 할머니 같은 우리 가족의 여성들, 국가가 부추긴 성 노동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모든 한국 여성들에게서 삶에 대한 영감을 얻어요.
당신의 어머니이기 전에 196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간 한 여성으로서 ‘군자’가 어떤 여성이었다고 상상하시나요?
A 나는 어머니가 항상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 여성은 매우 영리하고 야심 차며 모든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했을 거예요. 당시 한국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글래머러스하며 외모에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거부했어요. 이를테면 교육받을 권리처럼,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죠. 그녀는 급격한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에서 성년이 되었고, 현대적인 여성이 되기를 열망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전통적인 성 규범에 저항하며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어요.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미혼모는 물론 기지촌에서 일하거나 혼혈 자녀를 둔 여성에 대한 낙인이 매우 강력했죠.
우리가 이 여성의 삶을 통해 기억해야 할 선명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A 사회에서 ‘부도덕하다’거나 ‘미쳤다’는 등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로 한 사람을 특정 범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각의 삶은 지극히 복잡하고 충만하니까요.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비열한 민낯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여성은 회복력의 모델입니다. 한국에서 그녀의 삶은 매우 어려웠지만 강하고 자신감 있게 자신을 세상에 내보였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해질 수 있는 내면의 자원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당신의 글은 우리에게 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글이나 말을 통해 목소리를 낼 때 두려움이 앞섰던 경험은 없나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당신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A 네, 저는 두려움을 자주 느껴요. 제가 쓴 글에 대한 비판과 반대, 때로는 노골적인 증오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또 접하게 될 것임을 알죠.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처음으로 가족 역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생생한 꿈을 꾸었어요. 어린 시절의 집에서 닫혀 있는 문을 열기가 겁났지만,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죠. 그 꿈을 통해 저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강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지금도 두려움에 몸이 마비되기 시작할 때면 그 꿈을 떠올려요. 진실이 두려운 것일지언정, 그것을 파헤치고 이해하려는 욕구는 제가 가진 본성의 일부인 것 같아요. 이러한 성향이 때로는 고통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제 삶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 같은 맛> 다음으로 어떤 글쓰기와 연구를 계획하고 있나요?
A 미국의 지배적인 한국전쟁 서사와 우리 가족에 대한 서사를 다시 쓰는 <우리는 진주로 간다(We Will Go to Jinju)>라는 새 책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꿈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2008년에 어머니 유골을 가지고 한국에 왔을 때, 꿈에 어머니가 나와서 우리가 곧 진주로 갈 거라고 말했어요. 당시 저는 진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말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알았어요. 수년 동안 그 꿈에 대해 고민한 나머지 임신했을 때 아이의 이름을 ‘진주’라고 짓는 것도 고려할 정도였어요. 지난 20년 동안 발굴된 모든 학살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작년에 진주가 전쟁 중 학살이 가장 많이 집중된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당시의 한국, 그리고 디아스포라 한국인으로서의 집단적 역사를 탐구하는 저의 여정을 완성하기 위해 진주로 가라는 메시지를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한 인터뷰에서 사랑이야말로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주는 희망의 원천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과거나 현재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인류애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목도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은 어떤 식으로 극복하나요?
A 항상 인간을 엄청난 폭력과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동물로 보아왔지만, 결국 우리는 사랑하고 연민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전쟁, 노예제도, 정치적 억압 등 당신의 말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잃게 만드는 모든 것을 연구할 때 저는 항상 이런 행위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집중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범죄와 투옥에 관한 수업을 할 때 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을 높이는 사회적 조건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물질적, 정서적 욕구가 충족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훨씬 적습니다. 인간 동료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지닌 밑바닥의 본능이 드러날 때 그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조작되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받은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사회적 변화를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Editor
KIM JISEON
Photographer
최다함, 이현우, Courtesy of M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