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ART

THE ETERNAL REVOLUTION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캔버스 위에서 영속적인 혁명의 길을 만들어낸 노장 여성 작가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90세의 에텔 아드난의 모습. 산과 해, 대지 등 자연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에텔 아드난의 작품은 삶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Photographer James Mollison Courtesy of Getty Images

Etel Adnan, ‘Untitled(inv #287)’, 2017, Oil on canvas, 33cm×24cm Courtesy the artist and Sfeir-Semler Gallery, Beirut / Hamburg

파이돈과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Great Women Artists)>의 서문에는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1971년에 쓴 유명한 논문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가 언급된다. 린다 노클린은 여성 예술가들이 “흥미롭고 훌륭하다(interesting and very good)”는 평까지는 들어도 “최고로 위대한(supremely great)” 작가는 되지 못하는 이유를 파고들며, 누군가에게는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위대함’이라는 단어가 사실 그 사회의 문화에 따라 건설되는 개념임을 지적한다. “비난해야 할 것은 저 하늘의 별도, 우리의 호르몬도, 월경주기도, 내면의 비어 있는 공간도 아니다. 바로 제도와 교육이다.” 굴곡진 19세기를 치열하게 살아낸 이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야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여성 예술가가 많은 이유다. 생의 끝자락에서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는 이들의 모습은 경외심을 품기에 충분하지만, 삶에 대한 영감과 생기가 넘실대는 이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이 작품을 더 자주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들의 성취를 기념해야 한다.

Luchita Hurtado, ‘Birth’, 2019, Acrylic on linen Courtesy of Foundling Museum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98세의 루치타 허타도.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음에도 루치타 허타도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6년, 그가 96세가 되던 해였다.

색과 면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조합하는 추상화의 거장 에텔 아드난은 삶과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예술가다. 그는 1925년 베이루트에서 그리스인 어머니와 시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쟁의 시대를 관통한 그의 주된 무기는 글쓰기였다. 시와 소설, 저널리즘, 연극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던 아드난은 1954년부터 1962년 사이 발발했던 프랑스와 알제리의 전쟁 이후 강대국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드난이 새로운 언어로 선택한 것이 추상예술이다. “새로운 색상을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아드난은 단단한 팔레트 나이프를 쥐고(그는 붓 대신 나이프로 대담하게 작업을 전개했다) 계속해서 삶을 탐구해나갔다. 2021년에 96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냈기에, 현재의 우리는 에텔 아드난이 창조한 풍요로운 세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주로 산과 해, 대지 등 자연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아드난의 작품은 아름답다. 그러나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은 버겁고 인간들은 실망스러우며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날이 있어도 다음 날 아침에는 새로운 해가 뜨며, 그 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에텔 아드난의 작품은 삶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포트레이트 속의 사랑스럽고 인자한 모습 때문인지, 에텔 아드난은 거장 작가이기 전에 삶과 커리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인생 선배처럼 느껴진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창작 행위는 새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안심시켜줄 때도 있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 전반이 원래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술가의 일에 대해 너무 큰 소란을 피웁니다. 예술가가 다른 종류의 생명체인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작업을 계속하세요.” 어찌 됐든 하던 일을 묵묵히 계속하는 것, 이것은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우리에게도 유효한 조언일 것이다.
삶과 커리어에 산뜻한 영감을 주는 또 한 명의 예술가는 루치타 허타도(Luchita Hurtado)다. 1920년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허타도는 세 남자의 아내, 여러 아이의 엄마,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와 윈도 드레서 등 다양하고 유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아이들이 잠드는 밤이 되면 부엌 식탁에서 그림을 그렸다. 프리다 칼로, 맨 레이, 마르셀 뒤샹, 애그니스 마틴 등의 거장들과 어울렸지만 이들처럼 예술가로서 주목받지 못했다. 80년 가까이 그림을 그렸음에도 루치타 허타도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6년, 그가 96세 되던 해였다. 역시나 화가였던 남편의 유작을 정리하다 스튜디오 디렉터의 눈에 띈 루치타 허타도의 작품은 LA의 작은 전시회에서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허타도는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는 등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2020년에 기획한 루치타 허타도의 대규모 회고전의 제목은 ‘나는 살았고, 죽었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I Live I Die I Will Be Reborn)’였다. 허타도는 2020년에 100세 생일을 앞두고 타계하기 직전까지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생의 마지막 몇 년간 그가 매달린 주제는 생태 위기와 자연이었다. “나의 작품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 지구에 대해 생각하고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다면 희망적입니다. 나이 때문에 체력이 약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여입니다.”
루치타 허타도의 일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은 1971년에 로스앤젤레스 여성 예술가 위원회에서 진행한 여성 의식운동에 참여하고 나서야 그가 “내 작품을 벽 쪽으로 돌리지 않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허타도는 자신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저 좋아하는 일이기에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미국의 헌팅턴 뮤지엄에서 선보이는 신작 ‘Drifting Toward Twilight’ 옆에 선 아티스트 베티 사르의 모습. 평생 동안 작품을 통해 흑인 여성의 인권을 수호해온 베티 사르는 올해로 99세를 맞이했다.
Betye Saar, ‘Drifting Toward Twilight’, 2023 (installation view) ©2023 Betye Saar Photographer Joshua White Courtesy of The Huntington Library, Art Museum, and Botanical Gardens

호주의 원주민 예술가 샐리 가보리는 2005년, 약 80세의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몇 년 만에 2000점에 달하는 독창적인 작품을 쏟아내며 국내외적인 명성을 얻었다.

Mirdidingkingathi Juwarrnda Sally Gabori, ‘Dibirdibi Country 2008’, 2008, Synthetic polymer paint on linen, 200×600cm ©Mirdidingkingathi Juwarrnda Sally Gabori/Licensed by Viscopy, 2014

1926년에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티스트 베티 사르는 평생 동안 작품을 통해 흑인 여성의 인권 운동을 전개해왔다. 20대의 사르는 당시 예술에 관심이 있던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흔히 강요된 진로인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러나 곧 판화 작업을 시작했고, 수집한 물건을 재조합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에 빠져들었다. 베티 사르는 1972년에 처음 선보인 작품 ‘The Liberation of Aunt Jemima’로 유명해졌다. 흑인 여성 노예를 상징하는 유모 인형과 라이플총을 배치한 이 작품은 마틴 루서 킹 암살 사건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아이들을 돌보느라 시위 행진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 이후에도 베티 사르는 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작품을 이어나갔다. 바느질 도구, 단추, 장갑 등 여성의 노동과 삶을 상징하는 물건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지금 미국의 헌팅턴 뮤지엄에는 올해로 99세를 맞은 베티 사르의 신작 ‘Drifting Toward Twilight’이 전시되어 있다. 사르가 헌팅턴의 땅에서 발견한 물건들, 새장, 의자, 뿔 등이 놓인 거대한 카누가 바다 같은 푸른 방에 유유히 떠 있다. 벽에는 베티 사르가 쓴 시구가 붙어 있다. “황혼 속에서 고요한 바다를 표류하는 고독한 카누처럼 달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The moon keeps vigil as a lone canoe drifts in a sea of tranquility seeking serenity in the twilight).” 베티 사르의 작품에서 시간은 순환적이다. 그가 관통한 사적인 역사와 공적인 역사, 그로부터 얻은 경험과 감정과 지식은 시간을 가로질러 여행한다. 이 웅장한 카누 작품 역시 과거와 미래를 이으며 우리를 신비로운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지난해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호주의 원주민 예술가 샐리 가보리(Sally Gabori)의 작품 세계를 조명했다. 샐리 가보리는 2005년, 약 80세의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연히 노인들의 취미 활동을 돕는 워크숍에 참석했다가 캔버스 위에서 자신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가보리는 이후 몇 년 만에 2000점에 달하는 독창적인 작품을 쏟아내며 국내외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고령의 나이에 절박하게 작업에 매달린 이유는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다. 호주 북부 벤팅크섬에서 태어난 그는 20대에 모닝턴섬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는 카야딜트어를 하는 마지막 세대였고,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자신의 문화를 후대에 계승해야겠다는 열망으로 그림에 매달렸다. 샐리 가보리의 작품은 추상회화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가족들에게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 지형을 형상화한 작업이기도 하다. 40년 동안 방문하지 않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그의 작품은 카야딜트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투쟁인 동시에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한 개인의 눈물겨운 노력이기도 했다. 샐리 가보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나의 대지고, 나의 바다며, 바로 나 자신입니다.”

Editor
Kim Ji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