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관계미학
전시장 안에서 공명하는 예술가와 관객의 상호 작용에 관하여
돌아오는 2월, 리움미술관에서는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영상, 드로잉,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왕성하게 활동해온 파레노의 방대한 세계를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서 어떤 작품과 마주하게 될지 궁금하다. 그것이 한 작가의 개인전이든, 그룹전이든, 결코 다 소화할 수 없는 양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아트페어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바라보게 하는 작품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특정 작품과 관계를 맺는 순간이고, 우리는 결국 이러한 순간을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 종종거리며 전시장을 누빈다.
어떤 작가들은 관객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작품과 관계를 맺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필립 파레노는 전시장 안에서 이뤄지는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다. 그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 베를린의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 등 세계 곳곳의 예술적 장소에 커다란 어항을 만들어왔다. 멸종 위기에 처한 물고기 형상의 풍선을 전시장에 풀어놓은 작품 ‘My Room Is Another Fish Bowl’은 관객에게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관객들은 손끝으로 가볍게 물고기를 툭 치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떠 있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지점은 화이트 큐브라는 어항에서 천천히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부분적으로는 관객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기류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시대의 많은 예술 작품이 이런 식이다. 작품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관객 또한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2018년에 베를린 페스티벌(Berliner Festspiele)의 일환으로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Gropius-Bau)에 전시된 필립 파레노의 물고기 작품 ‘My Room Is Another Fish Bowl’은 관객에게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Philippe Parreno, ‘My Room Is Another Fish Bowl’, 2018, Helium-filled Mylar balloons, adhesive foil, air-columns Dimensions variable Photo: Andrea Rossetti Courtesy of Berliner Festspiele
관객과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며 수평적 관계를 맺는 예술 경향인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다. 그는 1990년대에 이미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지향점이 되지 못하며,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관객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현대 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예술가와 예술가의 연합,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연합뿐 아니라 예술가와 관객의 연합이 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부리오는 90년대부터 활발하게 벌어진 예술적 소동, 혹은 예술적 소통에 주목했다. 당시 필립 파레노는 노동절인 5월 1일에 사람들을 초대해 공장의 작업 공정 라인 위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게 했고, 태국계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는 갤러리 오프닝에서 태국 요리를 준비했으며, 크리스틴 힐(Christine Hill)은 슈퍼마켓에서 계산대 직원으로 일하거나 갤러리에서 체조 교실을 진행하는 작업을 했고, 카스텐 횔러(Carsten Höller)는 미술관을 놀이터로 만들었다. 부리오는 이들을 “과거의 예술가들처럼 이상적인 유토피아 건설에 집중하는 대신 현실 세계에서 더욱 잘 거주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예술가라고 보았다. 이들은 복잡한 사회에서 정지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은 그곳에서 작품과 놀이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경험한다.
탁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품.
Rirkrit Tiravanija, ‘Untitled 2021 (mañana es la cuestión)’, 2021, Silkscreen on Ping-Pong table and paddles. ‘Untitled 2012(Remember JK, Universal Futurological Question Mark U. F. O., Zócalo, México City)’, 2012. Image courtesy kurimanzutto, Mexico City/ New York. Photo: Michel Zabé & Omar Luis Olguín, 2012
1996년에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 지향적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의 그룹전 [Traffic>을 기획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필립 파레노,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카스텐 횔러,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등 이 그룹전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지속적으로 관계 미학을 탐구하고 확장하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 [WE]에서 서울대학교 미학과 재학생이 벽에 붙은 바나나를 먹은 후 껍질을 다시 붙여놓은 일은 관계 미학 계열 작품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해서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사건이다. 2022년에 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 개관전에서는 필립 파레노의 눈사람 작품 ‘Iceman in Reality Park’를 선보였다. 전시장 안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사람을 마주하고 잠시 당황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나? 일주일에 두 번 새로운 작품으로 교체된 이 눈사람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기 쉬운 화이트 큐브에서 선명하게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켰다. 카스텐 횔러는 피렌체의 팔라초 스트로치 같은 랜드마크에 대형 미끄럼틀을 설치하는 슬라이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웬만한 놀이기구보다 아찔할 것 같은 횔러의 미끄럼틀을 타고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작품 안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내면의 풍경에 관심이 있는 횔러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인간의 행동이나 인식,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을 새롭게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피렌체의 팔라초 스트로치(Palazzo Strozzi)에 설치된 카스텐 횔러의 슬라이드 작품은 아찔한 스릴감을 선사한다.
Carsten Höller, ‘The Florence Experiment’, 2018, a site-specific project, curated by Arturo Galansino, director of Fondazione Palazzo Strozzi. Courtesy of Michele Giuseppe Onali
지금 뉴욕의 모마(MoMA)에서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개인전 [A LOT OF PEOPLE]이 열리고 있다. 3월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의 홍보 문구는 간단하다. “탁구 게임을 즐기세요. 커리를 맛보세요. 음악을 만들어보세요(Play Ping-Pong. Taste curry. Make music).” 말 그대로 전시장에 방문한 관객들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설치한 커다란 탁구대에서 내기 경기를 할 수도 있고, 모마에서 커리나 팟타이를 만들어 먹는 경험을 할 수도 있으며, 기타를 연주하거나 드럼을 칠 수도 있다. 티라바니자는 이러한 활동들을 미끼로 (전시명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할 수 있는 일과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 모일 수 있다면, 서로의 차이를 조율하고 상대방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관객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설치 작품에 손을 뻗고 있다.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Public Opinion)’, 1991, black rod licorice candies in clear wrappers, endless supply. Courtesy of David Zwirner
예술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예술가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일 것이다. 2010년에 모마에서 열린 전시 [The Artist is Present]의 유명한 사진들을 보다 보면 내가 이 속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거나 아브라모비치의 강렬한 눈빛을 받으며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면? 쉽지 않은 순간이겠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강렬하고 경이로운 경험이었을 것만은 분명하다. 죽은 연인의 무게만큼 사탕을 전시장에 쌓아놓은 설치 작업을 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전시 전경 사진에는 유독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사탕이라는 물성에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린이 관객일 테니. 사탕을 한 움큼 집어 들거나 주머니에 가득 넣고 장난스레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작가가 겪었을 상실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치유받는 느낌까지 든다. 이처럼 현대의 관객들은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2010년 모마에서 열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 [The Artist is Present] 전경.
Courtesy of MoMA, Photo: Jonathan Muzikar
Editor
KIM JI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