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Erasing as Creation
텍스트를 소거하는 백발의 거장 에밀리오 이스그로의 작업세계
‘첫 번째 삭제’, 1964 China Su Carta di Giornale Montata Su Cartoncino in Blocco di Plexiglass 24.5×24.5cm,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마에스트로(Maestro)는 이탈리아어로 예술을 향한 집념에 천착한 이들을 일컫는 경외의 칭호다. 글을 지워내고 다시 쓰는 반복적인 행위에는 수많은 고민과 번민의 과정이 뒤따른다. 마에스트로라는 칭호에 걸맞은 에밀리오 이스그로(Emilio Isgrò)는 지우는 예술의 대가다. 언론인이자 시인, 조각가 등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지만 종합해보면 시각예술가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지긋한 백발의 노장이지만 생기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눈, 그의 예술을 향한 집착은 순수에 가까웠다.
‘천문학’, 2023, Dettaglio Serigrafia,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1937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에밀리오 이스그로는 음악가 아버지와 화가이던 삼촌의 예술적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가 되는 길’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했어요. 화가이자 조각가인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가 지금 제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죠.” 고향인 시칠리아에서 수학할 당시 그리스어와 라틴어, 철학을 동시에 접했는데 19세에 밀라노로 이주하면서도 그 세 가지 공부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전문학과 철학에 골몰했던 이스그로는 문자와 단어 생성 자체에 큰 흥미를 느꼈다. 1956년, 갓 스무 살 무렵 시집을 출간하며 시인으로도 발돋움한 그는 대학 졸업 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항상 수많은 문장을 가까이했다. 1964년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백과사전 텍스트를 지우는 기술을 선보이면서 ‘시와 개념미술의 탄생’에 기여했다. 개념미술이란 작품에 포함된 개념과 관념이 전통적·미학적·기술적·물리적인 것보다 선행하는 예술을 일컫는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마르셀 뒤샹이나 솔 르윗(Sol Lewitt) 같은 아티스트가 대표적이다. “나 자신과 시(poetry), 그러니까 언어적 회화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개념예술가로 착각했지만 나 스스로는 개념미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죠. 실질적으로 제거 작업을 시작한 것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려는 의지의 표명이었어요. 시인 혹은 작가들의 단어나 글, 무심코 내뱉는 말을 시각적으로 다뤄보자 연구한 것이 지금의 작품을 다루게 된 초석입니다.”
에밀리오 이스그로 재단의 전시실 전경.
에밀리오 이스그로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세 번의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고, 1977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1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쥔 이후 세계적인 미술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2019년 밀라노 자치단체에서 명예를 높인 인물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인 암브로지노 도로(Ambrogino d’oro)를 수상한 그는 이탈리아 전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심오하고 열정적이며, 냉철한 고귀함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예술가로 전 세계에서 활동했던 에밀리오 이스그로는 밀라노 중심부에 그의 재단이자 박물관을 설립했다. ‘예술가는 자신이 미래에 진정으로 무엇을 전달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본인의 삶에 대한 오랜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자 만든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아틀리에와 반복적으로 전사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혼재된 작품들, 그리고 이곳저곳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염료의 얼룩에서 이스그로의 예술적 성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쪽 ‘지리학 지도’, 1995, Acrilico Su Carta Montata Su Tavola, 46×49cm, Cancellature Su Carta Geografica in Box di Plexiglass, 121.5×94.5×3.2cm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아래왼쪽 ‘2015 밀라노 엑스포 오렌지 씨앗’, 2015, Oggi Presso Parco Sempione (Milano),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Photo: Andrea Valentini
아래오른쪽 ‘유럽을 위한 기도’, 2016, Acrilico Su Tela Stampata Montata Su Legno 160.2×114.8×5cm,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지운다는 것에 대한 통념은 주로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예술에서 흔히 삭제한 내용을 완전히 잊어야 할지, 깊게 되새겨야 할지 ‘삭제 기술’에 숨겨진 다른 의미가 있냐는 물음에 에밀리오 이스그로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같은 지식의 기념물을 24권이나 삭제하면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의 가치는 훼손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작품에서는 교육과 학교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싶었지요.” 실제로 이 작품에는 텍스트만 지운 것이 아닌 이미지까지 소거되어 있다. 이미지를 삭제하는 행위는 도상 파괴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미디어 사회의 아이콘을 거꾸로 추적해 오류를 드러내고,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려는 욕구와 관련 있다. “보통 첫 단계의 작업은 잉크를 주로 사용하며, 시중에 판매되는 흔한 세필을 활용합니다. 컬러 중첩을 위해 여러 번 덧바르는 과정을 거치죠. ‘그림을 그린다’라기보다 글쓰기에 가까운 형태로 작업에 몰두합니다.” 수평의 캔버스에서 그는 온몸의 세포를 오직 소거에만 집중한다. 에밀리오 이스그로는 단어를 덮고 있는 선이 표면적으로 확장되면서 시각적으로 완성될 때 비로소 작품이 이해될 것이라 전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지우는 행위 자체는 파괴하는 과정이 아닌, 어쩌면 남겨진 구문을 읽는 관객을 해방시키는 질서 정연한 재건의 과정이라고 덧붙인다. “부정을 새로운 형태의 지식으로, 모든 지식을 예술로 관조할 수 있는 시각적 현실로 변형시키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지우는 방식으로 원본 텍스트가 수정되고 재해석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담는다.
위쪽 ‘극작가 조반니 테스토리 기념물’, 2014 Milano, Bassorilievo, 1.47×23.4m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아래왼쪽 작업실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이어가는 에밀리오 이스그로.
아래오른쪽 ‘피타고라스의 성모상’, 2006 Opera Composta Da 4 Elementi Indivisibili, Pale 185×95cm, Courtesy of Archivio Emilio Isgrò
그는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에밀리오 이스그로에게 지우고 싶지 않은 것도 있냐는 물음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의 만남을 언급했다. 백남준과 그의 유명한 첼리스트 파트너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과 협업 공연을 위해 베니스에 방문했을 때 이스그로의 집에서 한 달간 손님으로 머물던 기억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고국에 대한 사랑과 예술을 향한 백남준의 열정이 그에게 오랜 여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밀라노 시내를 산책하다 보면 에밀리오 이스그로의 대리석 조각도 더러만날 수 있다. 일생을 작은 문자에 골몰해온 그를 대표하는 상징들은 거대하게 변모해 기념비처럼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중 그의 고향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과일인 오렌지 씨앗 조각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씨앗은 시작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나는 내 인생에 어떤 씨앗을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술가로서 ‘자유’를 정복하는 것이 씨앗을 틔우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일평생 지우는 행위를 자유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요.” 그는 지우는 것은 파괴하는 몸짓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는 부분을 강조하는 수단이라 덧붙인다. 파괴의 끝에는 또 다른 생성이 있고, 예술가는 부정의 의미에서 긍정을 창조한다. 이스그로의 작품은 표면적이고 피상적이다. 작품을 통해 자유의지를 표명하고, 지우고 그리는 행위에 집중한 경지를 끊임없이 보여주니 말이다.
Editor
LIM JI MIN
Contributing Editor
PARK JUNG YUN(아트 어드바이저)
Photographer
MATTIA SANTINI
자료 협조
에밀리오 이스그로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