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NEW VIBE YOUNG CREATORS
동시대 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영 아티스트
유년의 향수를 구현한 초현실, 연경석
가끔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편히 지내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금방이라도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벌거벗은 인물의 왜곡된 제스처, 낡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검도장 등 어딘가 모르게 한 번쯤 마주했을 법한 눈에 익은 배경들.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을 기반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업을 선보이는 3D 그래픽 아티스트 연경석의 작품 이야기다. 상하이 주재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의 전부를 보낸 그는 대학교 진학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마침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터라 인원 집합에 큰 규제가 있었고, 홀로 자취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가족과 중국에서 보내던 단란한 시간을 그리워하게 됐다. 어느 날 학창 시절 친구들을 초대해 추억을 공유하며 무료한 일상을 달래다, 우울함을 조금이나마 떨쳐내기 위해 데스크톱 앞에 앉는다. 그리고 이내 전공인 3D 프로그램으로 그의 추억을 담아낸 가상공간을 구현하기 시작한다.“저는 보통 장소로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거든요. 그 장소에서 내가 무엇을 했고, 당시 나의 감정은 어땠는지 끊임없이 상기합니다. 내가 그려낸 가상세계란 현재의 나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을 의미하죠. 좁은 거실에서 역동적인 몸짓으로 공을 차거나 기묘한 표정과 행위로 시선을 모으는 등 꿈속에서나 보던 비현실을 시각화하는 작업입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추억이 깃든 물건을 하나둘 꺼내 기억을 더듬었고 그리운 장소들을 구글링해 어떻게 하면 실제처럼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이어갔다. 그는 미래지향적인 3D 그래픽 트렌드와 다르게 과거에 집중해 지나간 경험과 기억을 3차원 세계에 다시 펼치는 작업을 진행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연경석은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둔 어린 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작업을 선보인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나둘 추억의 퍼즐을 맞추면서 향수병도 차츰 치유됐다. 기억을 가다듬으며 희열을 느낀 연경석은 이를 발판 삼아 장소를 모델링하며 본인만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은 상하이에서 느꼈던 것만이 아닌 한국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의 모든 감정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한국에 거주한 지 6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생의 전반적인 기억의 범위를 넓혀 3D 그래픽 툴로 작업하는 일에 본격 몰두 중이다. 그가 구현한 3D 그래픽은 액자처럼 평면에 그치지 않고 겹겹의 레이어를 더해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내 이야기에 타인이 공감해주고,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껴요. 지금은 3D를 기반으로 하지만 연경석을 떠올렸을 때 한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창작자가 되고 싶어요. 수많은 기억이 혼재된 것을 각색해 제작 과정에서 최대한 다양성을 갖춘 실험을 시도하는 편이에요.” 그는 상하이와 한국을 자주 오가며 지내다 보니 비행기를 타던 경험이 특별하게 와닿아 추후 항공사와 협업한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전한다. 3월에 열리는 홍콩 아트바젤 출품 작업도 준비 중이다. 연경석에게 시작이란 노스탤지어다. 가족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유년 시절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 매일매일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낸다.
우아한 곡목의 실루엣을 향한 탐닉, 전형호
“아트 퍼니처는 시각적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구의 기능적 면모까지 고루 갖춰야 합니다. 두루 세심하게 신경 써 사용자 입장에서 가구를 제작하는 것이 바로 아트 퍼니처의 매력입니다.” 일상의 호기심을 아트 퍼니처로 구현하는 작가 전형호는 기존 가구의 수직적 관념을 배제하고 유연하고 유기적인 곡선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조형 대학원에 진학한 뒤 자신만의 공고한 색이 담긴 작업을 이어가고 싶었다. 가구로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은 물론 사용하지 않을 때도 하나의 작품을 연상시키듯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비치길 바랐다.‘끊임없는 유동-flux 시리즈’는 단단하기로 이름난 물푸레나무를 깎아내고 접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가시적 생명력을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작업이다. 자연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시각화한 전형호의 대표적인 작품 시리즈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흐름과 이치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작업은 드로잉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원초적인 손 드로잉에서 시작해 완만한 물결로 거듭나 다시 어디론가 흐른다. 그가 생각하는 ‘흐름’이란 추상적인 에너지를 구현하기 위해 스케치 단계부터 절묘한 각도의 곡선을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것. 정교하고 세심하게 나무를 다듬는 과정을 거쳐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 칠흑 같은 어둠을 머금어 굽이치는 곡선의 가구로 완성한다. 이러한 작가의 노력 아래 탄생한 ‘끊임없는 유동’은 바다의 물결이 굽이치는 파고를 그려낸 것 같기도 하고, 검은 먹으로 그려낸 산수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전형호에게 시작이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끊임없는 유동 시리즈’를 마주했을 때 가구가 공간의 일부처럼 녹아드는 자연스러움이 제 작업의 소명이며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방효빈
컬러풀한 금속 선을 말아 만든 원을 독창적인 형태로 엮어내는 방효빈 작가의 작품은 경쾌하면서도 대담하다. 금속공예에서 작은 연결 요소인 ‘오링(O-ring)’을 과감하게 재해석해 주인공으로 이끌어낸 ‘오링 체어(O-ring Chair)’나 ‘오라이트(O-light)’ 등의 작품들은 어떤 곳에서든 선명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활기를 불어넣는다.
“저 스스로가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삶을 지향해서 원이라는 형태에 끌리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적부터 원의 곡선과 형태에서 안정감을 느꼈어요. 작업자의 입장이 되어서도 원은 촉각적으로 가장 매력 있는 형태고,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외형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원과 원을 연결할 때 생기는 빈 공간의 여백도 흥미롭고요.” 방효빈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화두는 ‘연결’이다. 연결 요소인 오링을 모티브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고, 무수한 연결이 반복되는 설치 작업을 통해 공간적인 확장을 시도했으며,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교류와 새로운 연결을 상징하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저는 유독 사람 간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뺏기기도 하는 편이에요. 그럼에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와 교류, 연대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게 삶의 목표이기도 해요. 이런 생각을 작업에 녹여내게 되는 것 같아요.”어떤 형태의 작업을 하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방효빈 작가의 믿음은 굳건하다. 여전히 금속이 뜨거운 열에 의해 찰흙처럼 녹아내리는 용접 과정이 가장 재미있고, 길을 걷다가도 재미있는 원형 모티브가 눈에 띄면 휴대폰 앨범에 담게 된다고 말하는 방효빈이 만들어내는 원형적 세계는 이 믿음을 중심으로 무한히 변주되고 증식할 것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유의미한 조우, 슈퍼포지션
시선을 사로잡는 투명 아크릴 소재의 전통 서랍장은 그래픽 디자인이 독보적이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소재로 제작한 유려한 곡선의 도자 시리즈도 같은 맥락이다. 마감의 흔적 없이 매끄럽게 제작되어 소재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분명 외형은 전통을 따르지만 패턴이나 소재에서 현대적인 미감을 오롯이 담고 있다. ‘중첩’이라는 뜻을 지닌 슈퍼포지션(Superposition)은 과거에서 시작된 전통적 이미지를 현재 한국에서 소비되는 이미지에 맞게 재해석하는 디자인 브랜드다.
물리학 용어로 ‘슈퍼포지션’은 두 개의 파동이 만나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잃지 않고 합쳐진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가구 디자이너 서정선과 그래픽 디자이너 김종민의 의미 있는 결합과 맥을 나란히 한다. 이들의 작업은 끊임없는 대화로 시작하고 완성된다. 가구와 오브제 디자인 및 제작은 서정선 디자이너가, 팀의 기획과 브랜딩 그리고 그래픽 아트는 김종민 디자이너가 맡는다. 지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영역에서 어떤 시너지를 낼지 고민하는 태도가 역력하다. “작업에 대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옛것의 느낌을 간직한 채 현대적으로 변주하는 전략을 썼어요. 지금은 많이 일반화된 작업이지만 여기에 김종민 디자이너의 그래픽 디자인을 더해 신선한 느낌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책가도 병풍이나 아크릴 캐비닛, 소반, 도자 등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분명히 전통 작업임에도 생경한 분위기를 띤다. 전통과 현대의 믹스 매치다. “기존의 전통 기물을 복원한다는 것은 복각에 힘쓰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현대 미디어의 이미지나 사상을 교체하는 것에 힘썼죠. 자개의 상징적 이미지를 디지털화하고 도자를 스테인리스로 교체하는 방법을 통해 슈퍼포지션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슈퍼포지션은 작업의 창작 과정에서 표면적 정보뿐 아니라 뿌리 깊은 사상까지 공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적 이미지를 구현하려 동양철학, 한옥 건축, 한국 미술사 등 전통 이미지를 취합하고 가공하는 과정을 거친다. 과거의 유물이 지닌 매력에 집중해 형태를 현대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조형적 요소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들의 시작이란 재해석이다.
슈퍼포지션의 작업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한국적 이미지를 전통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해석을 통해 현시대로 가져오는 일이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이란 많은 대중과 함께 소통할 때 그 가치가 더욱 꽃을 피운다. 이들이 앞으로 어떤 실험적 작품을 전개할지는 미지수다. 추후 한국적인 가구와 오브제를 넘어 공간 프로젝트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작업을 향한 슈퍼포지션의 새로운 시작이 기대감을 불러모으는 것만은 확실하다.
노동과 놀이 사이, 안예섬
색색의 실이 걸려 있는 직조기 앞에서 숙련된 손놀림으로 두툼한 직물을 직조해나가는 위빙 아트는 많은 시간과 끈기가 요구되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생경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작업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빙에 설치를 결합하는 작업을 하는 90년대생 아티스트 안예섬은 위빙 작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반복적인 움직임을 즐기며, 노동과 놀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위빙 작업은 처음에 패턴을 만들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순전한 노동이거든요. 그 시간을 놀이나 수련의 시간으로 여기는 성향이 아니라면 즐기기 어려운 작업이에요. 그래서 명상과도 관련이 있고요. 저에게는 묵묵하게 버티는 힘을 길러주는 그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건축과 섬유예술을 전공한 안예섬의 관심사는 공간을 향해 열려 있다. 가치 중립적이고 중간지의 성격을 띤 비상계단에서 위안을 얻은 경험은 푸른색 직선 패턴이 하늘로 뻗어 있는 형상의 설치 작품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에, 이사를 많이 다닌 어린 시절의 경험은 과거에 살던 30개가 넘는 집 주소를 이어 미궁의 형태로 만든 ‘미혹하는 집들(Deluding Homes)’ 시리즈에 담겼다.
“원래 집이나 물건에 애착을 많이 두지 않는 편인데, 위빙 작품이나 도구를 만지다 보면 복슬복슬한 촉감 때문인지 애착이 가더라고요. 부드러운 실을 만지고, 셔틀이 한 번 슥 지나가고, 그 위에 내 몸의 움직임이 쌓여 두툼하고 푹신한 천이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 자체가 주는 특별한 위안이 있어요.”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온도, 부드러운 질감 등이 담긴 안예섬의 작품은 지극히 공간적으로 다가온다. 씨실과 날실로 엮어 만든 자신만의 안락한 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무의식의 선과 여백이 완성한 세계, 성립
하얀 종이에 몇 번이고 그려낸 검은 선, 드로잉 아티스트 성립에게는 여백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캔버스로 변모한다. 어쩌면 그림보다 여백이 더 많을 때가 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성립의 간결한 드로잉은 스스로의 고민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수없이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자기 극복 과정을 거친 그림일 것이다. 절제의 미학이다. 일찍부터 그에게 그림이란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분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꿈꾸며 대학 진학을 위해 입시 미술에 매진하던 시절도 있었다. 좋아하는 일의 길목에 섰던 성립에게도 초기 어려움은 존재했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유화 작업도 진행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그림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에 묻어나는 시간과 노력이 작업을 완성하는 기준이라 여기던 그였지만 ‘내가 그릴 때 흥미롭지 않은 그림을 타인이 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어 모든 작업의 출발인 드로잉을 작품으로 이끌게 됐다. 성립의 작업에서 주목할 점은 드로잉과 함께 텍스트에 기반한 영감 노트를 동반한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담백하게 적어 내려간 일기장, 일상에서 스치는 단상들을 메모로 기록하고, 좋아하는 시구절을 습작하는 습관은 작업을 지어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학부 시절부터 많은 전시를 경험하면서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어요. 시각적인 메인 작업은 당연하고 작가들의 사적 감정이 담긴 아카이빙 노트를 흥미롭게 봤었거든요. 관객도 제 감정이 담긴 짤막한 텍스트와 드로잉을 함께 마주한다면 전시를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간 성립은 개인 작업은 물론 여러 브랜드와 협업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왔다. 최근에는 그의 정체성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드로잉에 설치 작업이나 미디어 아트를 접목한 몰입형 전시 [Opacity]가 바로 그것이다. 드로잉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자신에게서 파생한 지극히 사적인 일상을 모았다. 기존에 선보인 전시와는 다르게 성립의 내면이 담긴 인상 깊은 기록에서 더 나아가 사진, 체험형 미디어 아트, 설치 오브제로 공간을 채운 전시다. 성립에게 시작이란 아카이빙이다. 차곡차곡 쌓은 일상의 기록과 흰 여백 그리고 검은 선묘의 대비, 슥슥 자연스럽게 그려낸 모호한 경계의 선들이 모여 중첩된 하나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Editor
LIM JI MIN
Contributing Editor
KIM JI SEON
Photographer
SHIN YOO NA
HAIR
조은혜
MAKEUP
이아영
STYLIST
박정아
ASSISTANT
정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