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THE QUIET LUXURY

고아한 달항아리처럼 조용하게 스타일을 속삭이는 콰이어트 럭셔리의 세계

피비 필로의 올드 셀린 광고캠페인.

왼쪽 르메르의 정갈한 스토어.
오른쪽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토템.

왼쪽부터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카이트 컬렉션. 에르메스의 심플한 가죽 백. 올슨 자매의 더 로우 컬렉션.

최근 몇 년간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Y2K 스타일은 ‘이게 바로 패션이야’를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스타일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왔다. 패션과 문화의 호황기이자 모두가 호화로운 삶을 좇던 2000년대 초반, 젊음의 격정적 열기가 고스란히 투영된 패션 스타일은 하이패션 브랜드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커다란 로고, 현란한 컬러, 세기말의 자유분방한 무드가 응집된 존재감 넘치는 룩으로 또다시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로고를 대범하게 장식한 명품 가방과 액세서리를 구매하기 위한 오픈런 대기 줄은 여전한 성황이며, 거리에는 조금이라도 더 튀기 위해 애쓰는 화려하게 치장한 ‘쿨 키즈’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감 넘치는 로고 플레이와 난해한 패션 각축전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도 늘고 있는 추세다. 모두가 ‘그’ 브랜드의 로고 아이템을 손에 넣기 위해 기꺼이 오픈런을 감수하는 와중에 오히려 브랜드의 정체성을 치밀하게(!) 숨긴 ‘진짜’ 럭셔리의 세계에 눈길을 돌리는 이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 않나! 이런 현상은 약 10년 전 런웨이를 강타한 놈코어(Normcore) 룩과 자연스럽게 연결 고리를 이룬다. 과감한 실루엣의 파워 숄더와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워싱 데님,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높은 하이힐과 완벽한 헤어 메이크업의 유행이 지나간 후 마치 반작용처럼 간결하고 편안한 미니멀 스타일이 특징인 놈코어 트렌드가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한 것. 편안하게 몸을 감싸는 와이드 팬츠, 질 좋은 셔츠와 아우터, 로고보다는 품질에 집중한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가방과 납작한 슈즈 등 우리 몸과 마음을 유연하고 우아하게 어루만져준 놈코어 룩은 패셔니스트의 영원한 히로인 피비 필로의 셀린느 열풍으로 이어졌다. 시종일관 까칠하고 날카로운 이미지가 강한 전형적인 하이패션 디자이너의 모습은 피비 필로의 세계와는 대척점에 있다. 누구보다 패션에 진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소중한 가족과 여유로운 주말, 꽃이 우거진 정원, 투박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 속 라이프를 애정한 피비 필로는 여자들에게 보다 편안하면서도 한층 우아하고 고급스러우며 위트 있는 패션을 즐길 것을 제안했다. 매 시즌 그가 선보인 피비 필로식 놈코어 룩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그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팬을 양산했으며, 그 시절 셀린느 컬렉션은 ‘올드 셀린느’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중고 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고 있다. 때마침 반갑게도 이번 시즌에 이처럼 담백하고 우아한 스타일이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일상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왼쪽부터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토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카이트 컬렉션.

화제를 모은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스타일.

이름 그대로 조용한 고급스러움을 표방하는 콰이어트 럭셔리의 본격적인 열풍은 흥미롭게도 배우 기네스 팰트로 덕에 제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6년 발생한 이른바 ‘스키장 뺑소니 사고’로 민사소송에 휘말린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출석 패션이 재판 결과보다 더욱 뜨거운 화제를 불러 모았는데, 재판을 위해 법원에 출석할 때마다 더 로우와 셀린느, 프라다, 프로엔자 슐러의 고급스럽고 미니멀한 컬렉션 차림으로 등장한 덕에 콰이어트 럭셔리에 대한 관심이 수직 상승했다. 동시에 과거 그의 미니멀 룩도 주목받으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디자인, 고급스러운 컬러와 소재만으로도 이토록 근사한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담담하면서도 깊은 멋이 배어 나오는 올리브 그린 컬러의 더 로우 캐시미어 코트, 오랫동안 우아한 겨울 스타일을 함께할 아이보리 터틀넥 니트 톱, 무채색 재킷과 팬츠, 로고가 없어 왠지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방과 골드 주얼리까지. 콰이어트 럭셔리를 몸소 실천 중인 기네스 팰트로 스타일의 영향력은 곧이어 현란한 Y2K 스타일을 즐기던 켄들 제너와 지지 하디드 등 젠지(Gen-Z) 아이콘에게도 전파되면서 클래식하고 미니멀한 스타일을 소비하는 젊은 층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고. 이는 급변하는 트렌드의 흐름 사이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올곧게 콰이어트 럭셔리의 흐름을 이끄는 브랜드들이 이번 시즌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대표적으로 올슨 자매가 이끄는 브랜드 더 로우는 매 시즌 ‘조용한’ 컬렉션으로 휘황찬란한 파티가 끊이지 않는 패션계에서 누구보다 그들만의 아카이브를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리고 있다. 더 로우 컬렉션 어디에서도 로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보통 로고 플레이를 가장 강조하는 백 섹션에도 브랜드 이름은 아주 작게, 혹은 조심스럽게 새겨 넣었다. 대신 최고급 소재와 유려한 실루엣, 세월의 흐름 속에서 더욱 깊이 있는 빛을 발할 근사한 모노톤 컬러가 콰이어트 럭셔리를 상징하며 우리를 진짜 럭셔리의 세계로 이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신흥 럭셔리 브랜드 케이트 역시 화려한 치장 대신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페미닌한 터치를 우아하게 가미한 실루엣과 부유함이 느껴지는 소재로 견고한 팬층을 거느린 브랜드다. 앞서 언급한 더 로우보다는 조금 더 대범한 터치가 느껴지지만, 콰이어트 럭셔리를 대표하는 브랜드답게 과시하는 듯한 디테일보다는 좋은 소재와 실루엣 등 기본에 집중해 클래식한 룩을 즐기는 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다. 유행의 흐름을 반영한 컬렉션보다는 최고급 울과 캐시미어 등 차별화된 원단으로 고급화 전략을 중시하는 로로 피아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막스마라를 비롯한 하우스도 럭셔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 이처럼 럭셔리가 그동안 과거 유행한 미니멀리즘의 금욕주의를 표방했다면, 최근 급부상 중인 콰이어트 럭셔리는 패션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자 켄들 제너, 소피아 리치처럼 콰이어트 럭셔리 룩으로 부유해 보이길 원하는 이들을 충족시킬 명민한 트렌드임이 분명하다.

왼쪽부터 MAXMARA. MAXMARA. HERMÈS. HERMÈS. BOTTEGA VENETA.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코로나19 이후 고물가, 고금리로 세계경제가 둔화되면서 브랜드를 과시하지 않는 콰이어트 럭셔리가 급부상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회전문처럼 돌고 도는 유행 속에서 달콤하고 화려한 샴페인 거품이 터진 후에는 늘 한층 고요하게 정제된 트렌드가 뒤를 잇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가 아닐까? 일상의 다방면에서 피로감이 엄습하는 요즘 같은 때, 각종 자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콰이어트 럭셔리는 디자이너 피비 필로의 균형 잡힌 건강한 삶처럼 우리에게 색다른 해방감을 선사할 것이다.

Contributing Editor
KIM MI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