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THE SURFRIDERS’ DREAM

파도 위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가르며 살아온 여성 서퍼 3인

한국의 파도는 높지 않다. 이른 아침 높은 파도가 온다는 예고를 들으며 새벽부터 중문으로 달려나간 날. 황혜진 서퍼는 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었다.

황혜진 프로 서퍼는 2012년 서핑 여행 에세이 <오늘은 나를 바다로 데려가줘>를 공동으로 쓴 바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록시 코리안 라이더로도 활동 중이다. ©HAN YONG

서퍼의 삶, 2막을 준비하다 황혜진
황혜진이 서핑을 시작한 것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제주 중문 앞바다에서 검은 슈트를 입은 서퍼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중문 언덕에서 바다를 향해 내려가며 목격한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인생에서 서핑만은 반드시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때 나이가 스물세 살. 바다가 없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야자수로 둘러싸인 바다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황혜진은 14년 동안 프로 서퍼로 살았다.
그가 서핑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 서퍼 인구가 지금만큼 많지 않았다. 서핑이라고 하면 하와이의 높은 파도를 타는 금발의 서퍼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했던 때다. 한국 서핑은 1990년대 제주와 부산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서핑 문화를 접하고 온 사람들과 일본에서 서퍼로 활동하는 재일교포들을 통해 보급되었다. 제주 중문에서는 재일교포 듀크(이창남) 씨가 서핑을 주도적으로 전파했다.
“혼자서 목적 없이 파도를 타는 것보다 서퍼로서 나 자신이 어디까지 개척할 수 있는지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일본의 서핑 역사가 한국보다 70년이나 앞서 있죠. 한국과 파도 조건이 비슷해 그곳에서 배울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떠났죠. 지바와 쇼난, 시코쿠, 오키나와 등을 돌아다니며 스승들에게 서핑 레슨을 받았어요. 중문에서 타던 1세대 서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만난 아키라, 앙리, 마사야와 나쓰미, 하마세카이 선생님 등 모두가 제 스승이죠.”
황혜진은 제주와 부산에서 열리는 서핑 대회에 거의 해마다 출전했다. 2009년 7월 제주국제서핑대회 여성부 오픈 1위를 시작으로 제주와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 서핑 대회에 해마다 출전해 거의 1~2등을 다투며 좋은 성적을 얻었다. 2014년부터는 주종목인 롱보드로 출전의 빈도를 높이는데, 2018년까지 총 18번 입상했다. 이쯤 되면 본래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를 아는 서퍼들은 대회에 출전해 파도를 가르는 황혜진의 모습을 보며 파워풀한 라이딩과 과감함을 칭찬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손사래 친다. 그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해 디자이너로 일했다. 재능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서핑을 배울 당시 자신과 달리 저 멀리 파도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의 오기는 서핑과 바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신과 깨달음이 자신과 삶을 가득 채울 만큼 큰 것이었다. 그 크기는 도전하기 전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와이의 바다처럼 거대한 파도와 그 사이에 생기는 통로, 즉 배럴과 같은 길은 한국에서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잔잔하면서도 나름 거친 면을 지닌 한국의 파도를 서퍼들은 바다에 나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스키장처럼 마련된 슬로프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퍼들은 파도의 매끄러운 면과 거친 면을 보며 순간의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타고 나아간다. “같은 파도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물론 높이나 간격, 바람이 부는 방향 등 파도를 가늠할 수 있는 큰 범주는 있지만, 매번 달라요. 파도는 인생과 닮았죠.”
간혹 태풍 전후 크고 거친 파도를 만난다. 높은 파도 저 멀리 2~3명 정도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을 보면 ‘오늘 파도는 인간이 탈 수 있는 파도구나, 나도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고 도전한다. 높은 파도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서핑에 성공하면 스릴은 배가된다. 본래 자신을 내성적이고 약하다고 생각한 황혜진은 무수한 파도를 극복하며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또 서핑은 인공적이지 않은 활동임을 강조했다.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스포츠이다 보니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없다. 황혜진이 서핑을 두고 “서핑은 까칠하고 변덕스러운 여자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듯, 여느 서퍼들처럼 파도를 기다리는 일에 지치고 실망하면서도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서 해변과 수평선을 바라보면 자연에서 하나의 점처럼 느껴져요. 파도를 탈 때 얼굴에 닿는 상쾌한 공기,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속도감 등 모든 것이 좋아요. 큰 욕심 부리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지평선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바다에서 나 자신과 보드 하나만으로 행복이 가능해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죠.” 2018년에 참가한 대회 이후 전례 없던 코로나19는 서핑 라이프에도 영향을 주었다. 겨울철 2~3개월 동안 발리에 머물며 양질의 파도를 타던 시간도 항공 사정으로 제한되었다. 자신의 활동명을 빌려 운영하던 ‘지타 서프’라는 현지 서핑 캠프도 중단되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파도가 오지 않는 시간을 맞이한 황혜진은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서핑을 14년간 하고 나니 이제는 대회 출전 비중을 줄이고 있어요. 서핑 시즌에는 중문 서핑 스쿨에서 서핑 교육을 하고 다른 서퍼들과 소통하면서 제 스스로 또 다른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최근 대한서핑협회(KSA)에서 심판교육 과정도 이수했어요. 심판으로 활동할 생각이 있어요.”
서핑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커졌다. 2008년 설립된 대한서핑협회의 주도로 2020년 서핑 종목이 대한체육회에 준회원 단체로 승인되었다. 서핑 종목이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할 경우 준회원 가입이 제외되는 한시적 승인이지만, 그들의 결실은 서핑 선수들에겐 갚진 것이다. 이제 서핑으로 대학을 가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더불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참가 선수들의 기량에 점수를 부여하는 심판 역할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황혜진은 자격 취득을 시작으로 선수들에게 공정한 점수를 주는 심판이 되기 위해 도전해보려 한다. 또 올해 하반기 작업치료사의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서핑을 통해 그가 자연에서 받은 긍정적인 변화와 행복은 결국 사람으로 향하고 있다.

바다에 나가기 전 서프보드에 왁스를 문지르며 좋은 파도가 오기를 기대한다. 물론 매번 기대하는 파도가 오는 것은 아니다.

30여 년 전 파도에 반해 송정과 사랑에 빠졌고, 서퍼의 삶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바닷가를 거닐며 쓰레기를 줍고, 좋은 파도를 만나면 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일상은 앞으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WOO SANG HEE

파도 위의 삶 서미희
서퍼들이 사랑하는 바닷가 송정은 부산의 여느 바닷가처럼 여름철이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서미희가 서핑을 처음 목격한 건 부산 송정에서였다. 윈드서퍼였던 서미희는 보드 하나에 몸을 싣고 서핑하던 한 외국인을 봤고, 서프보드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나비처럼 날아다니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수많은 윈드서핑 대회에서 연달아 우승한 이력을 접고 그는 송정에서 홀로 서핑을 시작한다. 송정을 찾은 외국인 서퍼에게 배우기도 하고 서핑 관련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배워나갔다. “윈드서핑 대회를 위해 전국의 바다를 다녔어요. 그런데 송정이 유일하게 사계절 내내 파도가 들어왔죠. 해변으로 남서풍과 북동풍이 분다는 건 파도도 들어온다는 뜻이에요. 처음에는 윈드서핑을 위해 송정에 자리를 잡았지만 저는 오히려 서핑의 미래를 보게 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독학으로 3년 정도 배운 후 5월의 어느 날 파도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어요. 그러곤 자신들도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며 수업을 신청했죠.”
서미희가 발견한 서핑의 미래는 송정서핑학교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핑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 서핑 대회에서 수차례 1등을 거머쥐었고, 2008년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선수로서 자신의 꿈을 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꿈이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선수 육성에도 힘을 썼다. 그렇게 송정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서핑을 가르치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포함해 총 7명의 국가대표 선수를 키워냈다. 그리고 서퍼들이 좀 더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서핑을 즐길 수 있도록 민간구조대도 운영하고 있다. “어릴 때 꿈이 타잔과 결혼하는 거였어요.(웃음) 밀림을 지키는 모습이 너무 멋지게 느껴졌죠.”
서미희를 시작으로 지금의 송정은 처음 서핑을 배우러 온 청춘들부터 어린아이들과 함께 서핑을 배우려는 가족, 혹은 오랫동안 서핑을 사랑해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장 쉬운 수식어로 사람들은 서미희를 1세대 서퍼라고 부르지만, 서핑을 독학으로 공부해 국가대표를 길러내는 일 외에도 그로 인해 송정은 많은 모습이 변했다. 그중 하나가 송정의 등대 옆에 파도 관측기가 설치된 것. 파도가 오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보통 인공위성 사이트를 보는 것인데, 이에 더해 관측기를 설치해 파도가 오는 정확한 시간을 관측하는 장치다.
“파도를 읽는다는 건 서퍼에게는 파도를 언제 즐길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안전과도 관계된 일이에요. 여름이면 이안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다를 좀 더 잘 읽을 수 있으면 이안류가 오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죠. 아주 먼 바다에 태풍이 온다면 멀리 있는 육지는 영향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먼 바다가 태풍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태풍의 영향을 받은 파도가 이안류를 일으킬 수 있어요. 이안류의 가능성이 관측되면 구조대 역시 이를 유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서핑 연습만큼이나 바다를 공부하는 일에도 파고들었다. 송정 앞바다에 사계절 내내 파도가 밀려오는 이유와 바람의 방향, 파도의 방향을 분석하기 위한 해양학과 기상학, 물리학을 공부했다. 국내 서핑 인구가 지금처럼 많아지기 훨씬 이전부터 끝없이 파고들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는 꿈을 꾼다. 그 꿈을 꾸는 동안 송정을 떠날 마음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는 수강생이 많지 않아 수입도 안정적이지 않으니 남편이 송정을 떠나 새로이 정착하자고도 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수요도 없지만 좋은 보드를 발견하면 사두었어요.” 바다를 배우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고기를 알아야 바다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마음으로 먼 바다에 직접 나가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올 때도 있다. “언젠가 엄청 큰 오징어를 직접 잡았어요.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조금씩 꺼내서 화이트 와인과 먹으면 정말 맛이 좋죠.”
자신은 몇 시간 동안 서핑과 관련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몇 시간이고 반복해 보며 독학으로 서핑을 배웠지만 제자들은 좀 더 큰 파도의 세계에서 더 큰 꿈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외로 훈련을 보냈다. 만삭의 몸으로도 서핑을 했던 서미희의 딸과 아들은 파도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올림픽에 대한 꿈은 저 대신 제자들이 이룰 거라 믿어요. 현역 선수였을 때, 제자들이 농담 삼아 본인들이 이제 우승해야 하니 그만 출전하라고 말했죠.(웃음) 마흔세 살, 제주 중문에서 열린 ‘국제서핑대회’에서 우승하고 뒤이어 9월 일본 후쿠오카현 가라츠에서 열린 ‘서퍼 걸 서핑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어요. 서핑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기까지 기다릴 순 없었지만 그 우승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싶었죠.”
서퍼를 키우는 일만큼이나 공들이는 것은 서퍼를 지키는 일이다. 한번은 호주에 윈드서핑 훈련을 갔는데 외국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간 후에도 한국 선수 한 명이 계속 남아서 훈련 중이었어요. 그때 해양경비정 한 대가 그 선수를 3시간 넘게 지켜줬어요. 호주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서퍼를 위한 전문 구조단체가 있어요. 반면 한국에서는 여름에만 공식적인 구조대가 활동하죠.” 또 하나 요즘 주력하는 일은 서핑의 사계절화다. 파도가 좋은 5월과 6월, 9월과 10월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더 많은 사람이 서핑을 즐겨야 직업으로서 서퍼가 된 자신의 후배들이 더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퍼를 지키는 일만큼 바다를 지키는 일도 자신의 과업이라 여긴다. 지금은 서핑 선수로 활약 중인 딸 이나리가 다섯 살 때 바다에서 놀다가 날카로운 금속에 찔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녹이 슨 금속에 찔려 혹시나 아이에게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꽤 큰 사고였다. 이런 해양 쓰레기는 모래사장에 새로운 모래를 부을 때마다 반복된다. “송정을 천국으로 만들고 싶어요. 매일 송정과 썸 타는 사이예요.(웃음) 아침에 송정에 오면 매일 바닷가를 돌며 청소해요. 오늘도 시멘트 덩어리며 녹슨 금속 여럿을 주웠죠.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해변을 걸을 수 있도록 아름다운 송정을 꿈꿔요. 제가 파도 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서핑을 배우려고 했던 것처럼 바다를 청소하는 일에도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좋겠어요.”
내년에는 초등학생 체육 교과서에 ‘서핑의 시작이자 송정의 시작’이 된 서미희의 이야기가 담긴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온 일은 없다. 다만 서핑을 본 순간 사랑에 빠졌고 파도를 읽고 싶었으며 바다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고,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이곳 송정에 온 게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서핑을 마주한 순간 제 미래가 보였고 엄청난 사랑에 빠졌죠.”
더 많은 서퍼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송정 바다에서 파도를 가르는 일, 제자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일, 송정의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면 바다를 실컷 즐기는 일, 그리고 지구의 어느 곳보다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를 만드는 일. 서미희는 지금껏 송정을 떠나는 삶을 생각해본 적 없다. 두 아이를 송정에서 낳아 서퍼로 키웠고, 자신 역시 송정에서 삶을 시작한 이래 계속 꿈을 꾼다.
“발리에 가면 부드러운 파도가 오는 ‘올드 비치’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 가면 7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도 서핑을 하는데, 정말 고난도 기술을 쓰며 파도를 내려와요. 저는 아직 늙어본 적이 없어요. 서핑은 제 삶입니다. 파도를 사랑하고, 파도가 없는 날도 사랑하고, 큰 파도가 없는 날도 사랑하면서 계속 서퍼로 살아갈 거예요. 삶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으면 분명히 심심할 거라고 생각해요. 마치 파도처럼요. 바다가 곧 인생의 모습인 셈이죠.”

국가대표 여자 롱보드 부문 1호 문리나. 거친 파도를 탈 때만큼은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전한다.

유럽에 처음 초청받은 2019 포르투갈 글라이딩 바나클스 서핑 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싱글핀 롱보드 초대 대회에서 아시안 중 유일하게 2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서핑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전부 문리나
하얀 파도 거품이 천천히 일면서 하늘 위로 솟구친다. 거품은 이내 깨지면서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진다. 서퍼들이 가장 좋아하는 파도다. 문리나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스마트폰 앱에 깔린 웹캠으로 전국 각 지역의 파도를 확인한다. 포항, 부산, 양양 등 원하는 파도가 일렁인다면 당장이라도 보드 장비를 들고 달려갈 태세다. “한국은 서핑 연습하기 좋은 조건이 아니에요. 좋은 파도의 조건을 좇아 외국에서 훈련에 매진하다 보면 지출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죠. 오로지 파도의 상태만 보면서요.” 열정과 근성이 대단했다. 바닷속에 들어가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일상에서 느끼는 근심과 걱정, 모든 스트레스가 파도와 함께 썰물처럼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시작한 서핑은 그녀의 인생관 자체를 바꿔놓았다. 바다 위의 서퍼. 오롯이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격려하고 환호하는 이들이 곁에 있으면 더욱 쉽고 재미있다.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선수 생활을 하니, 비교적 늦은 나이에 서핑을 시작한 케이스예요. 대구에서 자랐고 아버지 여름휴가에 맞춰 포항으로 휴가를 떠났던 게 유년 시절 유일한 바다와의 추억이에요. 스무 살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말리부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을 본 뒤 잔상이 오래도록 남더라고요. 아주 어릴 적 TV에서 키애누 리브스가 출연한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보던 장면을 눈으로 목격하니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그림 같던 서핑 장면의 잔상, 그 설렘은 꼭 서핑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송정 서핑학교를 등록했고, 아예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서핑에 매료된 원동력은 바다가 주는 에너지. 파도 속에만 뛰어들면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순수함에 젖어들었다.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파도 수면 위의 반짝임, 바다에서 바라본 육지 등 모든 것이 그녀를 충만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보드를 잡았을 때 생각한 것보다 크고 무거워서 놀란 기억이 있어요.” 파도가 주는 평온함에 흠뻑 빠져 매일같이 서핑을 즐기다 우연한 기회로 참가한 대회에서 입상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자연스레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다. “아시아 투어에서 랭킹 3위, 전체 성적 3위에 입상하고 감격해서 펑펑 운 적도 있었고, 해외 트립을 갈 경우 여자 홀로 커다란 롱보드를 2~3개씩 짊어지고 다녔는데 힘들어서 눈물을 머금은 적도 많았어요. 3m에 가까운 보드를 가지고 공항을 누비면 모든 사람의 시선은 온전히 제 몫이었어요.” 유럽에 처음 초청받게 된 포르투갈 대회에서 아시안 중 유일하게 2위라는 성적을 냈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첫 롱보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나중에 아버지의 목에 당당히 금메달을 걸어드린 일도요.”
문리나에게 연습이란 매일같이 밭을 일구며 모난 돌을 골라내는 농부와 같은 수행의 일부가 됐다.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웨스트자바 바투카라스(Batu Caras)로 2주간 훈련을 다녀왔어요. 서퍼들이 성지순례처럼 서핑 트립으로 많이 방문하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매일 파도를 탔는데, 훈련을 마치고 마시는 코코넛 음료는 정말 꿀맛이었죠.” 문리나는 훈련이 없는 여가 시간에 주로 요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요가는 지금의 그가 서핑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게 도와준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요가와 서핑은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요가의 밸런스와 집중 명상이 서핑과 매우 닮았어요. 서핑과 요가를 병행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이 좋아 요가 강사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현재는 서핑과 요가, 이 두 가지가 제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서핑을 통해 삶의 다양한 통찰력을 얻고, 덜 힘들고, 더 나은 환경에서 후배들이 도전하는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매년 여름이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부산, 제주, 강원도 양양 등의 해변을 가득 메운다. 서핑을 망설이는 이에게, 더 나아가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이에게 문리나의 스토리는 작은 선물처럼 다가온다.

Editor
HAN JI HEE, LIM JI MIN
Contributing Editor
PARK MIN
Photographer
HAN YONG, WOO SANG 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