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A RACE AGAINST TIME
럭셔리 워치와 스포츠가 공유하는 본능에 대하여
위부터 리차드 밀의 최초 여성 스포츠 워치 RM 07-04 모델 완성에 일조한 육상선수 나피사투 티암. 모나코 그랑프리 80주년을 기념하는 태그호이어의 신작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스켈레톤’. 롤렉스가 타임키퍼를 맡은 프랑스 오픈(Roland-Garros) 속 카를로스 알카라스의 경기 장면.
아주 예전부터 사람들은 ‘때’를 알고 싶어 했다. 일어날 때와 잘 때를 알려주고 기도할 때와 싸울 때, 장이 열릴 때와 닫힐 때를 알려주는 시간은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시간은 점차 복잡해진 인간의 욕구만큼 정교하게 측정해야만 했다. 해, 물, 불, 모래, 종… 갖가지 소재는 그렇게 시계의 근간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기계와 태엽이 장인들의 손을 거쳐 오늘날 시계로 탄생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24등분으로 쪼갠 이 약속의 언어는 공정성과 계측이 결과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와 불가분한 관계를 이뤘다. 육상, 경마, 레이싱, 구기 종목 등 경쟁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고성능 타이밍 시스템의 필요성은 하늘을 찔렀고, 럭셔리 워치 브랜드들은 스포츠 산업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오늘날 워치 브랜드들에게 스포츠 경기는 꺼지지 않는 광고판이나 마찬가지다. 윔블던, PGA 챔피언십, 각종 승마와 요트 경기 등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경기장 주변엔 언제나 골드 베젤이 상징적인 롤렉스의 녹색 시계탑이 등장한다. 수백, 수천 분의 1초에 따라 세계인의 희비가 갈리는 올림픽 경기 속 오륜기만큼 1932년부터 등장한 오메가의 심벌도 제법 익숙하다. FIFA 월드컵, 프리미어 리그 경기 중 누군가에겐 속절없고 누군가에겐 반가운 선수 교체 전광판엔 언제나 위블로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시합 중 일어난 모든 활동의 시간 계측에 관여하는 공식 타임키퍼 자리를 꿰찬 워치 하우스의 이름은 스포츠의 중독적 매력에 빠진 수많은 마니아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각인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럭셔리 스포츠가 보여주는 젊고 활력 넘치며 고급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은 2, 3세대 고객층을 원하는 워치 브랜드들의 이미지 구축에도 효과적이다.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주’로 알려진 밀레 밀리아는 ‘순정’ 빈티지 자동차만 출전할 수 있는 레이싱이다. 연식이 가장 오래된 차부터 출발 그리드에 서서 이탈리아를 수일간 누비며 아름다운 카퍼레이드를 선보인다. 아버지와 자녀로 구성된 팀이 참여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쇼파드는 1988년부터 이 경주를 후원해온 것을 넘어 올드카 요소를 반영한 동명의 워치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쇼파드 공동 사장인 카를-프리드리히 슈펠레는 경주에 직접 참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문이 소유한 또 다른 차량은 하우스의 홍보 대사가 운전한다. 밀레 밀리아의 전통, 대를 이어 물려주는 클래식 카, 가족과 지인이 함께 즐기는 레이싱이라는 우아한 가치들이 쇼파드의 아이덴티티가 된 셈이다.
왼쪽부터 쇼파드가 후원하는 밀레 밀리아 레이싱과 동명의 워치 컬렉션. 팀과 함께 모나코 그랑프리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막스 페르스타펀.
한편 스포츠 스타는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우상이자 영원한 아이돌이다. 승자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선수의 성취와 기쁨에 공감하고 싶은 팬들의 마음을 자극한다. 포뮬러 1 레이싱의 여러 단상이 좋은 예다. 좁은 시가지를 달리며 아름다운 해안을 감상할 수 있어 F1의 꽃이라 불리는 모나코 그랑프리는 최정상 드라이버들이 우승을 꿈꾸는 트랙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열린 대회의 승자는 오라클 레드불 팀의 막스 페르스타펀. 파트너인 태그호이어는 모나코 워치 커스텀 모델을 그에게 선물했다. 알다시피 모나코 워치는 과감한 사각 케이스 디자인으로 1969년 처음 등장했고, 2년 뒤 영화 <르망>에서 스티브 매퀸이 착용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하우스의 아이코닉 컬렉션이다. 그 자체로 모나코 그랑프리와 모터스포츠를 대표하는 이 워치는 다이얼에 붉은 숫자 ‘1’, 케이스백에 ‘One of One’ 문구, 그리고 막스 페르스타펀의 챔피언십 우승 횟수를 상징하는 두 개의 별을 새긴 모습으로 그와 함께 시상대에 올라 짜릿한 샴페인 샤워를 했다. 이 커스텀 모델은 컬렉션 최초로 스켈레톤 다이얼을 적용한 신모델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스켈레톤에 기반한다. 모나코 그랑프리 80주년을 기리며 출시한 이 제품은 막스의 우승과 착용으로 스토리를 완성해 마니아들의 소장욕을 자극한다. 마치 유니폼처럼 응원하는 팀에 소속감과 유대를 다지게 하는 팀 워치도 등장했다.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포뮬러 원™ 팀의 공식 엔지니어링 파트너인 IWC 샤프하우젠이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파트너사를 위한 공식 팀 워치를 제작한 것이다. 디자이너, 공기역학 전문가, 레이스 엔지니어, 전략가, 정비공 등 선수와 차를 뒷받침하는 스태프의 열정과 결단력에 대한 경의를 담은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 모델로, 자동차 엔지니어링 분야에 널리 쓰이는 티타늄을 주 소재로 사용하고 팀의 시그너처 컬러인 그린으로 마무리했다. 지난해 론칭한 이 모델은 올해 열린 마이애미 그랑프리를 기념하며 태양이 작열하는 이 도시의 생동감을 반영한 핑크 러버 스트랩 모델로 라인업을 확장했다.
왼쪽부터 롤렉스와 인연이 깊은 로열 윈더 호스 쇼의 한 장면. 롤렉스와 인연이 깊은 테니스의 전설, 로저 페더러와 윔블던 경기.
물론 럭셔리 워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지 않는다. 기록 향상을 위해 첨단 트레이닝을 도입하는 스포츠처럼 장인의 손길과 탁월한 기술력을 집약한 어떤 시계들은 측정 기능에 충실함으로써 극한에 도전하는 선수들을 보호한다. 브랜드의 이름부터 산과 인연이 각별한 몽블랑의 마크 메이커이자 세계적 산악인인 님스다이 푸르자는 지난해 몽블랑의 1858 제로 옥시젠 타임피스를 착용하고 에베레스트를 등정해 두 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두 기록 모두 무산소 등정과 관련 깊은데, 이 시계는 이름 그대로 내부에 산소를 제거해 고도 차이에서 오는 급격한 온도 변화에 의한 김 서림과 부품 산화를 방지하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의 도전을 함께했다. 산소가 없으면 모든 구성품이 오래 유지되고, 시간이 흘러도 안정적인 정밀도를 제공해 열악한 환경에 있는 탐험가들에게 여러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작 1858 지오스피어 크로노그래프 제로 옥시젠 8000은 산소가 충분하지 않아 사람이 생존하기 어려운 해발 8000m 이상의 산을 보조 산소 없이 오르는 산악인들의 위업에서 영감을 얻었다. 님스다이 푸르자에게 헌정하는 리미티드 에디션 290의 케이스는 무산소 상태에서 조립되었고, 케이스백에 14개의 8000m 이상 봉우리 목록과 님스다이 인용문, 행운의 히말라야 깃발 등을 새겼다. 이탈리아 왕실 해군에 고정밀 장비를 공급하며 역사를 시작한 파네라이의 워치는 바닷속 다이버 장비로도 활약한다. 아메리카 컵 요트 대회에서 루나로사 프라다 피렐리 팀의 공식 스폰서로 나선 파네라이는 이 협업을 기념해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 루나로사 모델을 1500피스 한정 생산한다. 특유의 특허받은 크라운 보호 장치와 러버 소재를 적용한 크라운 및 단방향 회전 베젤은 요트 레이스를 비롯한 혹독한 환경과 활동을 견딜 수 있도록 고안했다. 30bar 방수를 보장해 깊은 바다의 수압에도 거뜬하고, 잠수 시간 측정 기능도 탑재했다.
위쪽부터 IWC 샤프하우젠과 파트너사인 솔라리스 요트가 제작한 요트. ‘더블 문’이라는 이름은 IWC 퍼페추얼 캘린더 컴플리케이션 문페이즈에서 영감을 얻었다. 롤렉스의 녹색 시계탑이 익숙한 U.S. 오픈.
기술적 진화에서 나아가 더 깊은 사고로 스포츠 워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리차드 밀은 남성 주류의 산업에서 분투하는 여성 스포츠 선수들을 응원하고 나섰다. 브랜드 최초의 여성 스포츠 워치 컬렉션인 RM 07-04 오토매틱 스포츠는 단순히 남성 모델의 다운사이즈 버전이 아님을 증명하듯 연구 및 개발에만 3년의 공을 들인 야심작이다. 레이싱, 육상, 동계 스포츠 분야의 여성 스포츠 파트너 6인은 제품의 기능과 디자인 등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며 기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5000g의 충격을 견뎌내는 스켈레톤 칼리버의 시원한 구조가 돋보이는 한편, 자외선 차단 기능까지 갖춘 벨크로 스트랩의 중량은 36g에 불과해 운동하는 여자들에게 최적화했다. 자체 개발한 친환경 소재인 루센트 스틸™ 부품을 포함한 자사의 모든 시계 80%에 적용하겠다고 발표한 쇼파드, 마찬가지로 재활용 스틸로 제작한 eSteel™과 재활용 러버 스트랩을 적극 활용하는 파네라이 등 럭셔리 워치와 스포츠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메타버스 속 축구 스타디움의 타임키퍼가 된 위블로, 국내 e-스포츠 리그인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의 우승 반지를 제작하는 티파니는 스포츠가 나아갈 미래에 중요한 자리 하나를 선점한 듯하다.
애초부터 럭셔리 워치와 스포츠는 평행우주 속 분신처럼 근본 가치를 공유하는 사이다. 기록을 향한 경쟁과 열정, 최고를 만드는 정예의 기술, 시간과 땀으로 완성한 팀워크. 놀랍도록 닮은 서로의 모습에 이끌린 건 본능에 가까운 사건 아닐까? 인간의 삶에 규칙과 기준을 만들어준 이 측정기는 작은 손목 위에 올라간 예술 작품이 되었고, 스포츠의 숭고한 정신을 공유하며 고차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첨단 기계로 나아가고 있다. 달콤한 승리의 맛을 본 둘이 한 팀으로 만난 이 경주는 이제 시작이다.
IWC 샤프하우젠과 파트너사인 솔라리스 요트가 제작한 요트. ‘더블 문’이라는 이름은 IWC 퍼페추얼 캘린더 컴플리케이션 문페이즈에서 영감을 얻었다.
Contributing Editor
SEO JI 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