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Beyond Sustainability

패션계의 리셀과 리사이클의 흐름

기존 가방을 새로운 가방으로 교환하는 멀버리의 친환경 프로그램 ‘멀버리 익스체인지.

리셀과 리사이클링은 패션계와 상생하며 나아가야 할 새로운 문화 현상이자 ‘필환경’적 행보이다.
전례 없는 팬데믹이 인류를 습격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의 소비 패턴은 놀라울 만큼 새롭고 다면적인 방식으로 변모했다. 천문학적인 돈이 시중에 풀리고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폭발하며 값비싼 럭셔리 패션 아이템을 향한 소비도 수직 상승했지만, 동시에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착한’ 행보도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라, 에이치앤엠을 비롯한 SPA 브랜드의 패스트패션에 매료됐던 사람들이 팬데믹을 지켜보며 지구를 병들게 하는 패스트패션의 엄청난 폐기물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한 것. 전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전례 없는 전염병이 사실은 우연이 아닌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지구환경 보호와 지속가능성의 흐름이 더욱 대두되고 있다. 사실 이미 패션계는 수년 전부터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친환경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동물의 가죽과 털을 잔인하게 채집하는 비인간적 방식을 철회한다는 ‘퍼프리’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 오래고, 컬렉션 무대장치부터 룩을 제작한 자투리 천과 장식품까지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 작업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목재 패널로 완성된 벽 구조물과 카펫 등 런웨이 제작에 사용된 재료를 회수해 재활용한다는 발렌시아가와 미우미우, 직물과 가죽 자투리를 모아 재사용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구찌의 ‘구찌 업(Gucci Up)’ 프로젝트는 럭셔리 하우스의 대표적인 리사이클링 행보다.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친환경적 행보이자 새로운 문화현상은 바로 중고 거래다. 타인의 흔적이 깃든 물건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들의 편견조차 단번에 변화시킬 만한 요즘 중고 트렌드는 과거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그야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각광받고 있다.

중고 컬렉션을 판매할 수 있는 발렌시아가의 ‘리-셀 프로그램’.

흥미로운 점은 오래된 빈티지 중고 제품의 유행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들이 바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태어난 Z세대라는 것. 입었다 하면 바로 유행하는 패션 아이콘 벨라 하디드와 지지 하디드 자매, 켄들 제너의 최근 몇 년간 파파라치 사진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템 역시 엄마와 이모가 즐겨 들던 그때 그 시절 빈티지 아이템이었으니! 존 갈리아노가 디올에서 명성을 떨쳤던 시기 불티나게 팔렸던 디올 새들 백부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셔가 분신처럼 들고 다녔던 펜디 바게트 백, 족히 20년은 넘었을 법한 샤넬 빈티지 체인 백을 든 이들의 모습을 목도했을 때, 엄마의 옷장 속에 묵혀놓은 오래된 명품 가방들이 아른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유행에 힘입어 패션 플랫폼 매치스 패션은 아예 오래된 중고 빈티지 제품을 따로 판매하는 ‘Pre-Loved’ 섹션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세컨드 핸드 패션 플랫폼 ‘더 리얼 리얼’과 ‘베스티레이르 콜렉티브’ ‘왓 고우스 어라운드 컴스 어라운드’의 주가는 수직 상승했을 정도다. 실제로 더 리얼리얼은 구찌, 버버리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와 함께 중고 컬렉션을 판매하는 이벤트를 진행해 큰 성공을 거두기도. 젠Z 아이콘들의 중고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런웨이에 올랐던 베르사체, 톰 포드, 샤넬, 이브 생 로랑의 빈티지 드레스를 레드카펫에서도 당당하게 즐겨 입는 흐름이 톱 셀러브리티들 사이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최근 포착된 벨라 하디드의 레드카펫 드레스는 모두 빈티지 제품일 정도로 그녀의 중고 사랑은 거침이 없다. 기민하게 변화를 흡수하며 또 다른 방향성을 모색하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가 이러한 흐름을 놓칠 리 없다. 콧대 높은 럭셔리 하우스에게 중고 시장은 더 이상 낡고 고루한 분야가 아닌 젠Z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친환경까지 실천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키워드일 테니까. 발 빠르게 유행을 선도하는 발렌시아가는 지난해부터 ‘리-셀 프로그램’을 전개해 화제를 모았다.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가 발 벗고 나서 자사의 중고 제품을 매입한다는 소식은 많은 이에게 놀라움을 안기는 동시에 럭셔리 패션 시장의 모범이 되었다. 온전히 지속 가능한 순환 모델을 구현하기 위해 플랫폼 ‘리플런트’와 파트너십을 체결한 발렌시아가는 지난 시즌 상품을 판매하는 고객에게 금전 혹은 스토어 크레디트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선보이며 재사용과 재활용에 대한 기존 편견을 과감하게 허물었다. 발렌티노 역시 파트너십을 맺은 스토어에 발렌티노 빈티지 제품을 접수해 새로운 제품 구매로 유도하는 뜻깊은 프로젝트인 ‘발렌티노 빈티지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안했다. 이는 지속가능이라는 테마를 기반으로 전개되지만, 동시에 하우스 전문가들의 심미안으로 까다롭게 채택한 빈티지 제품을 주목할 만한 전 세계 스토어에서 큐레이션 형식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메종의 영역을 좀 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특성을 통해 개성과 진정성을 포용하고 이를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돋보인다. 최근 서울에서는 성수동의 ‘제인마치 메종’에서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재옥의 디렉팅 아래 발렌티노 빈티지 프로젝트를 선보여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토록 놀라운 변화의 흐름은 빠르게 변모하는 ‘트렌드’가 아닌,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어 우리의 일상으로 깊숙이 침투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의 혜택을 아낌없이 누린 전 세대가 남긴 환경 파괴를 고스란히 떠안은 새로운 세대에게 친환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곧 일상과 직결된다. 유행을 좇아 새 상품을 구매해 또 다른 폐기물을 양산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이들에게 더는 매력적이지 않다. 그 대신 빈티지 시장을 발 빠르게 ‘디깅’하며 색다른 스타일을 발견하는 행위는 더없이 쿨하면서도 환경보호 활동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오죽하면 케어링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조차 “중고 시장은 럭셔리에서 진정한 변혁적 요소”라 언급했을까! 이렇듯 리셀과 리사이클링의 독보적인 세계는 향후 패션계와 상생하며 함께 나아가야 할 새로운 문화현상이자 ‘필환경’적 행보이다.

Contributing Editor
KIM MI KANG
사진 제공
로에베, 멀버리, 미우미우, 발렌시아가, 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