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음식으로 연결되는 두 마음

요리로 맺어진 할머니 홍순과 손녀 예하.

홍순과 예하의 만남, 한 접시

 

 

“할머니의 흑미밥과 저의 강황밥을 섞어 아이스크림처럼 담았어요. 미니 파프리카 보트에는 지난해 봄을 담은 제피잎장아찌를 담았죠. 앞으로도 멀리 떠나보자는 우리의 여행선이에요.” 밥과 봄동된장국 한 접시 차림. 제피잎장아찌, 셀러리장아찌와 연근부각을 더한 샐러드, 연근차, 강정, 깻잎부각, 고소한 들기름과 들깨를 숟가락에 얹었다.

먹고사는 일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보드라운 살갗과 체온을 느끼며 생존을 위한 본능을 표출하고 삶을 영위한다. 사냥한 먹이를 새끼의 입에 넣어 성장과 자립을 돕는 동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먹는다’는 일은 애초 관계를 맺으며 이뤄진다. 관계하고 먹고, 먹으며 관계를 배운다. 본질적인 두 과업이 우리의 인생을 채운다.
지난해 2월, 경상남도 진주시에 사는 할머니 홍순 씨에게 손녀 예하가 같이 살겠다고 찾아왔다. 처음은 아니다. 공부하느라 육아 병행이 어려워진 딸과 사위로부터 아기 예하를 받아 안았던 24년 전 그날처럼 할머니는 걱정 반, 설렘 반인 상태로 손녀를 맞이한다. 그렇게 홍순과 예하의 두 번째 동거가 시작되었다.
예하는 꿈도 많고 손재주도 좋은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예하가 할머니와 다시 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응원했다. 할머니의 음식 솜씨와 요리에 진지한 그의 뜻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엄마 손을 마다하고, 아침마다 도시락을 준비할 만큼 예하는 요리와 스타일링에 관심이 높았다. 친구들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그는 1년간 요리를 배우고 한식, 중식 그리고 떡 자격증을 취득했다. 나만의 삶을 살겠다는 MZ의 소신이다.

깔끔한 성격을 닮은 부엌 한편. 호박떡을 하기 위해 자른 노란 호박, 아카시아 효소, 키위 소스, 백태와 마늘을 찧는 두 개의 돌.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마다 할머니의 오랜 장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할머니 밥을 먹으며 자란 예하는 성인이 되어 ‘밥심’을 되새긴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은 밥심은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는 2년 전 비건 세계에 눈을 떴다. SNS에 자신이 만든 채식 요리를 소개했다. 한 접시에 여러 가지 음식을 담은 예하의 자연을 닮은 요리는 아름다웠다. 진심을 담은 글귀마저 온라인으로 연결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지지를 받는다. 예하는 음식 솜씨 좋고 채소 요리와 친한 홍순 씨를 스승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
“진주에서 유치원 시기까지 살았어요. 그때까지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죠. 할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입맛’을 공유했어요. 제가 주는 대로 잘 먹었대요. 경기도 집으로 돌아가서도 방학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왔어요. 온갖 채소와 나물, 한식과 떡을 할머니를 통해 배웠어요.”
진주시의 새벽 시장에도 선생님들은 가득했다. 새벽 4시에 문을 여는 중앙시장은 제철을 맞은 식재료를 팔레트처럼 펼쳐낸다. 할머니들이 산에서 밭에서 갓 수확한 나물과 채소를 팔고 있다. 이맘때면 쑥과 달래, 봄동 그리고 딸기가 맛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시장에 가서 재료를 판매하는 분들과 대화를 나눈다. 쑥은 키가 작은 것이 맛있고 끝이 불그스름한 것이 좋다고 쑥의 특성을 건네는 그들로부터 재료를 배우고 요리에도 보탤 아이디어를 얻는다.

세상에 하나뿐인 할머니의 요리 학교

 

 

할머니가 예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음식은 식혜였다. 처음치고는 난도가 높다. 밥을 꼬들하게 지은 후 엿기름 등을 넣고 삭히며 기다려야 하는 음식이다. 과정이 번거롭고 실패 확률도 높다. “처음에는 까마득했어요. 할머니는 간부터 보고 요리를 시작해요. 자꾸 적당히 넣으라고 하시는데, 이것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1년 동안 그 감을 어느 정도 배웠어요.”
요리 솜씨가 좋은 할머니에게 스승은 따로 없었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칼국수를 보통 아닌 솜씨로 만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직접 배울 기회를 갖진 못했다. 할머니에게 스승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무조건 밥을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먹으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었죠. 그저 내가 해준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맛있다”고 할 때까지 만들어보는 방식이었어요. 또 이웃집에서 만든 장이 맛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맛을 보러 가고 나도 잘 해보려 애를 썼어요.”

 

 

늙은 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채수에 뭉근하게 끓인 후 소금 간을 한 수프는 홍순 씨가 어린 시절에 많이 먹던 음식이다. 커다란 김칫독에 무를 채 썰고, 무청을 송송 썰어 소금과 함께 넣고 익힌 음식이 나중에 동치미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두세 달 지나면 그 커다란 독이 비었다. 감칠맛이 있는 동치미와 청국장, 나물 정도로 밥을 해먹던 시절이다. 예하가 어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도 대개 이런 것들이다. 특히 청국장은 집의 보물이다. 각종 채소를 듬뿍 넣은 청국장을 먹고 자란 예하는 이제 그것을 넣고 비스킷으로 만들어 간식으로 먹는다.
홍순 씨의 특기는 떡에서 발휘된다. 쌀가루에 호박채와 설탕을 넣고 버무리는 손이 능숙하고 또 그 모습이 정겹다. 결혼해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무주군에서 교육의 도시 진주시로 이사한 할머니는 떡방앗간을 열어 제일 좋은 기계들을 들였다. 예상대로 20년간 솜씨를 발휘하며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예하가 빵보다 떡을 좀 더 가깝게 배우게 된 것도 할머니 덕분이다. 또 떡을 만드는 재료들이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홍순 씨가 만들고 예하가 꾸민 시루떡에는 팥고물이 떡 밑에 깔려 있다. 아래위로 팥고물을 묻힌 시루떡이 아니다. 위는 함께 섞은 재료들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로 예하는 이제 막 핀 매화꽃 가지를 올렸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많은 것이 쏟아지는 시대잖아요. 이런 시대에 창의성이라는 것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두 가지를 잇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밥을 짓는 느린 시간, 깊이 연결되는 두 마음

 

홍순 씨의 요리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 각종 장류는 물론 발효 음식 등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들이 많다. 또 기본이 전부가 된다. 예하는 요리에서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리라고 하면, 뭘 더 넣어야 할 것 같고, 더 해야 할 것 같고…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비법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좋은 요리의 비결은 덜어내는 것에 있었어요.” 요리의 근간을 탐구하다 보니, 결국 맛있는 요리의 비결은 장맛에 이른다. 한 해 중 가장 맛있는 때에 수확한 재철 재료와 집에서 만든 장이다.
“할머니와 살면서 10년 된 소금이 어떻게 이렇게나 감칠맛이 있는지, 쓴맛이 없는 소금이 음식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각종 채소를 넣고 끓여 묵힌 간장도 감칠맛이 뛰어나요. 그것만으로 간을 해도 충분하죠. 할머니의 비법은 결국 장맛이었어요.”

 

 

친구들과 자주 못 만나는 예하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세상이 그를 MZ라고 부르는데 또래 친구들과 공유하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가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온다는 그는 뒤이어 호박시루떡에서 올라오는 몽글몽글한 김을 닮은 말을 했다. “할머니가 있어서 생각보다 많이 심심하진 않아요. 우리는 마음까지 나누고 있으니까요. 예전엔 할머니한테 얘기해봤자 뭐가 될까 싶었는데, 제 고민을 들은 할머니의 답은 지혜로 이어지더라고요. 위로가 필요할 때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요.”
할머니와 손녀, 50년을 훌쩍 넘긴 시간의 격차. 음식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틈을 열어준다. 처음에 몰라서, 처음이라 서툴러서 조금씩 부족했던 부분이 메워지며 서로 완전해지고 있다. 이제 막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신입 요리사는 시간으로 농축된 할머니의 경험을 전수받고, 경험으로만 익혀온 할머니의 레시피는 눈빛이 반짝이는 손녀를 만나 이론이 되고 아름다워진다.
“세상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는 예하는 1년간 할머니에게서 요리만 배운 것이 아니다. 더 멀리 항해할 수 있는 돛을 세우고 있다. “전 미래지향적인 사람이었어요. 계획에 집착했죠. 요즘의 저는 그러지 않아요. 계획은 바뀔 수 있고, 언제 생각한 대로 살아진 적이 있기는 했나 싶어요. 그저 지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자는 마음에 할머니에게 요리를 배우러 온 거예요.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거든요. 서로가 하루라도 더 젊은 날을 함께하자는 마음이 컸어요. 미래의 저에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너의 선택을 정답으로 만드는 삶을 살았으면 해요.”

봄이 피어난 듯 호박시루떡

 

 

“겨우내 집을 지키고 있던 호박을 잘랐어요. 쌀가루에 가늘게 채 썬 호박과 작두콩을 섞으니 지난가을 냄새가 나요. 호박의 노란색은 자식과 손주를 위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닮았어요.” 할머니의 팥고물을 깔고 호박채, 설탕과 쌀가루와 섞어 만든 시루떡. 봄맞이 쑥과 매화를 얹었다.

사월의 갈레트

 

 

“각기 다른 식감을 가진 과일, 찹쌀전병이 선물처럼 씹히는 갈레트예요. 쑥과 사랑초 꽃을 얹어 앞으로도 계절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듬뿍 담았죠.” 할머니가 만든 오디딸기잼을 곁들인 계절 갈레트. 진주 토종밀과 콩가루가 더해진 반죽에 익힌 딸기, 생딸기, 익힌 금귤과 생금귤을 넣었다.

Editor
HAN JI HEE
Photographer
MAENG MIN HWA
Food Stylist
이예하
Makeup&Hair
제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