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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사는 9명의 여성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지금을 사는 여성들

아시아 여성 최초가 되다 한희수

와인마스터 한희수는 지난해 베트남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대회 역사상 여성이 우승한 것은 처음으로 그는 ‘아시아 최초’라는 명예를 얻는다. 이것은 개인의 영광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아시아 1등 여성 소믈리에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한희수는 열아홉 살에 프랑스로 건너가 우연히 와인 산업에 매료돼 공부를 시작한다. 시제가 까다로운 프랑스를 짧은 시간 어렵지 않게 배웠다는 점에서 성실함과 꾸준함을 읽을 수 있었고, 보르도에서 와인을 익힌 시간에서는 용기와 당찬 면모가 보였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23세였다. 섬세하고 예리한 눈빛, 정확한 언어 구사와 당당한 태도,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유연함이 그가 살아온 시간을 설명해주었다. 대회에서 승리한 비결도 변화의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해낸 한희수의 태도가 결정적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은 와인 생산국이 아니다. 소믈리에를 예우하는 프랑스에 비하면 와인 문화도. 관련 직업도 그 역사가 짧다. 실력을 쌓는 것은 물론, 그것을 증명하는 일 또한 직접 해야 한다. 와인 소믈리에 대회는 와인 전문가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희수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시아 1등이 되기까지의 수많은 과정을 들어보면 연습과 노력은 분명 타고난 재능을 앞선다. 한국 지리는 잘 몰라도 프랑스 지도는 꿰뚫고 있다는 그는 까다로운 블라인드 테스트와 서빙 등의 과제가 주어지는 대회 직전에는 매일 최소 10종류의 와인을 시음하며, 비용은 물론 스스로 인내하는 시간과의 싸움을 이어간다. 공부도 만만하지 않다. 요즘에는 기후변화로 해마다 와인 생산지와 품종에 변화가 생기고 관련 법 또한 변경되는 일이 잦다. 계속 찾아보고 익히는 수밖에 없다.
여성과 소믈리에는 숙명적인 관계다. 와인이라는 아주 섬세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세계에서 여성은 특유의 기질을 발휘한다. 그런데 와인의 본질은 술이다. 여성 소믈리에가 결혼 후 임신을 하면 적어도 1년을 쉬어야 한다. 오감에 날을 세워 와인을 테이스팅해야 하는 직업에 타격이 크다. 대회에 참가하는 남성과 여성의 비중은 7 대 3 정도로, 여성 참가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적은 이유도 이러한 직업적 숙명이 영향을 주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소믈리에로 살다 보니 결혼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2년 전 운명처럼 반려자를 만났죠. 하지만 임신은 역시 쉬운 선택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제 커리어에 단절이 생기는 일이지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든 어려움을 넘어서고 싶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소믈리에로 살고 싶거든요.”

그 누구도 아닌 나와 싸우다 김다인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어요. 어느 대상을 바라볼 때도 남녀를 구분해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젠더리스 패션 브랜드 마뗑킴의 수장답다. 아주 빠른 속도로 명쾌하게 답을 낸 김다인 대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기억을 되짚어보듯 생각에 잠겼다.
마뗑킴의 컬렉션을 보면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느 한 면을 읽을 수 있다. 적당히 유행이 반영된, 자연스럽고 러프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여성들. 그런 옷을 남자가 함께 입는다.
지난 연말, 마뗑킴의 매출이 500억원대, 올해는 1000억원을 바라본다는 기사를 읽었다. 뷰티 브랜드 ‘마지 두 마뗑’을 새롭게 전개한 올해 더 성장할 거라는 가능성을 내다본 숫자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신화를 쓰고 있는 브랜드의 저력을 김다인에게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김다인은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다. 세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유학 생활도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2015년 국내로 돌아온 그는 용돈 정도의 비용으로 구입한 옷 몇 가지를 블로그에서 팔았다. 옷은 모두 팔렸고, 그 수익을 재투자하는 방식을 거듭했다. 그것이 마뗑킴의 시작이다. “선입견이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정해진 업무 방식도 없었죠. 단기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는 계속해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았고, 늘 꿈을 꾸고 있었어요.”
브랜드를 전개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안 될 거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어떤 조건이 안 돼서, 또는 그런 사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마다 제일 힘에 부쳤다고 고백한다. “내 자신과 싸워야 했어요. 고통스러운 순간이 성장하기 직전임을 믿으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자신과의 싸움에서 약속했던 단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바로 “지지 말자”였다.
오랜 생각 끝에 김다인 대표는 자신이 여자여서 좋았던 유일한 하나를 찾아낸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것”이라고. 유일하게 성을 의식하는 순간이 그에게는 사랑의 대상 앞에서였다.

고유한 자신을 지키는 법 정세랑

소설가 정세랑에게 빳빳한 옷감으로 만든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러플이 달린 드레스를 골랐다. 하늘거리고 말랑한 옷이다. 따뜻하고 충만한 감정을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의도된 분위기로 인물 사진을 찍었다.
정세랑이 보통 아닌 팬덤을 가진 이유는 소설의 인기만이 아니다. 분명 정세랑이라는 사람에게도 있다. 줄곧 소설을 내던 그가 2021년에 발표한 수필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는다면 그에게 무척 기대고 싶어진다. 방대한 독서량으로 빚어진 지식들, 그 위로 쌓아 올린 사유, 소소한 온갖 관심사와 취향들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 곳곳에서 풍요롭게 녹아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성격까지도 말이다.
작가는 권력이 있는 쪽보다 약자의 편에 서고, 이분법적인 성의 구별에 질문을 제기하고, 인간보다 약한 존재들과 지구 환경에 목소리를 내왔다. 작품들은 정세랑이라는 토양에서 태어났고, 그를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작품마다 전하고 싶은 것이 달라요. 그때그때 이야기와 메시지가 잘 어울리는 형태를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가끔은 그저 즐거운 작품을 쓰고 싶고, 또 가끔은 평소 가지고 있던 질문들을 담아볼 때도 있어요. 후자일 때도 정해둔 답으로 바로 이어지기보다 대회의 시작이 되길 바라면서 써요.”
그는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며 감정을 배제한 의사소통 방법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회복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창조하는 동안 작가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세랑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할 때 특별히 애쓰는 부분은 개개인별로 복잡하게 구성된 고유한 정체성이다. “고유의 목소리와 의견이 있는 존재로 그리려고 신경을 써요. 캐릭터의 관점과 의견이 저와 일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일치하지 않을 때가 의외로 재미있어져요.”
우리는 종종 당연하게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 사고하고, 단순한 기준으로 분류해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또 작가마저 틀 안에 넣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쓴 그를 SF소설가라고 부르고, <시선으로부터,>를 발표하자 여성주의 작가라고도 했다. 앞으로 한동안 정세랑은 추리소설을 쓸 것이다.
그는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창작자다. 최근 아시아 작가들과 진행한 프로젝트 소설집 <절연>을 기획한 것도 놀라운 행보다. 게다가 그가 쓴 ‘절연’은 소설집 말미에 작가들과 대담에서 언급한 그간의 ‘콤포트 존’에서 아주 살짝 빗겨나 있다. 사고의 틀 안에서 예상할 만하면 그는 달아난다.
“나와 다른 누구와 마주치든 그 사람을 요약하지 않고 온전히 바라보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복잡한 것을 복잡한 대로 사랑하고 싶다는 선언이겠네요.” 작가가 전해온 올해의 다짐은 자신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나를 발명해온 인생 윤석남

“내가 생각이 모자를 수도 있고, 공부가 모자를 수 있는데 여성주의 작가라는 말을 들어도 되나?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죠. 하지만 내심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10대 때 이루지 못한 화가의 꿈을 40대가 되어 시작한 윤석남 미술작가에게 그림은 자신을 찾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시작한 그림을 그는 매일 그렸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982년 개인전을 처음 열었을 때 세상이 자신에게 처음부터 붙여준 ‘여성주의 작가’라는 말은 뒤늦게 시작한 작가에겐 굴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였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에 걸맞은 좋은 작업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고 지금까지 왔다. 40년 전 첫 개인전 제목은 <어머니>였다.
윤석남 작가가 작품으로 말해온 여성주의는 유교적인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파괴된 자연의 힘을 복원하고 사랑하고 보듬는 일”이라고 작가는 늘 강조해왔다. 그는 여자로 태어났고, 평생 힘든 시절을 극복하며 여성으로 살아온 어머니로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가난했어요. 엄마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밭일과 장사를 해가며 6명의 자식을 손수 키우셨어요.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손을 돕겠다고 했을 때 매우 역정을 내셨죠. 엄마가 아니었으면 사립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며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잠들 때 어둠 속에서 도스토옙프스키의 소설을 읽어주던 엄마였다. “지금까지 나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어요. 나는 돈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돈은 필요하지만 이 세상 최고라는 생각은 없어요. 그것을 엄마에게서 배웠어요.”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작업실에 작가는 매일 오전 8시에 나와서 작업을 한다. 40대부터 매일 한 시간씩 걸으며 체력을 관리해왔다. 늦게 시작했던 만큼 오랫동안 살며 작업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중단하게 될까 봐 준비했던 매일의 다짐이다. 윤석남 작가는 그간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들과 힘없는 강아지들을 그렸고, 지금은 일부 발표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계속해 그리고 있다. 역사에서 나라를 위했던 남성들의 초상화와 사진은 많은데 여성은 자료조차 구하기가 어렵다. 목표는 120점이다. 이 숫자는 올해로 여든다섯이 된 작가가 수집할 수 있는 자료와 자신의 체력을 고려해 정한 것이다. 현재 반 이상의 인물들을 그렸다. 특별히 작가가 가장 애쓰는 부분이 따로 있었다. “이 사람들의 눈빛만은 완벽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싶어요.”
규칙적인 일상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는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한 날은 작은 난입이나 다름없었다. 오후 4시가 되면 작가는 반려견과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나간다. 작업실 뒤로 펼쳐진 마당 저 멀리서 하얀 털뭉치가 보였다. 긴 털을 날리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잔디에 앉아 작업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비를 마쳤다는 듯 등을 편 채로 말이다. 예정된 산책 시간을 한 시간 훌쩍 넘기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반려견의 모습에서, “독립운동가를 완성한 내년에 그때도 내가 건강하면 새로운 꿈을 꿀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모습이 겹쳤다.
“사람들은 자신을 ‘발견’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발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죠. 여자로 태어난 것도.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뜻을 찾아야 해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자기 뜻을 자기가 창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발명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해요. 결혼한 작가가 있으면 건강관리부터 하며, 조급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부딪히고 터득한 경험의 자산들 하예진

“집안에서 첫째 딸이에요. 말 안 듣는 장녀요. 고향이 부산인데, ‘무조건 될 거야’라며 서울로 왔죠.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많이 싸우고, 고군분투했어요.”
누데이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예진은 대학에서 영상을 공부했다. 영화와 패션, 잡지 등 창의를 발휘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일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섭렵한 문화적 자양분과 예술을 향한 관심은 그를 계속해 움직이게 했다. 그의 커리어 궤적을 듣는 동안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노력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
그런 시기를 지나 조금은 단단해진 하예진은 운명처럼 다양한 실험을 시작한 젠틀몬스터의 김한국 대표를 만난다. 홍대 쇼룸이 막 오픈한 시기였다.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전시 프로젝트 팀에 합류했고 공간이 콘텐츠가 되는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공간에 이어 경험에 주목한다. 2~3년간의 실험을 거쳐 2021년 탄생한 경험 콘텐츠가 바로 검은 화산 모양으로 만든 ‘피크(Peak)’로 강렬한 첫인상을 건넨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다. 디저트는 메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체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선호한다. 청담동과 성수동 누데이크 매장에는 여자 손님이 없는 테이블이 없다. “우리는 디저트를 감정으로 규정하고 있어요. 디저트는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라고.” 디저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자고 했던 호기로움은 3년 차에 접어들자 점점 진지해지고 있다. 아이돌 뉴진스와의 협업과 같은 놀라운 화제성도 필요하지만, F&B의 본질은 맛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4명의 팀과 함께 누데이크를 디저트 브랜드의 클래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의 욕심은 커졌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과거에 일을 못하면 ‘여자는 저렇지’ 하는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어요. 여자를 대변해 진짜 최선을 다하려고 했죠. 그런데 목표치 이상을 해내려고 하면 기가 너무 세다는 이야기가 들렸어요. 그런 말을 듣고 일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예진 디렉터가 집을 떠나 되뇌던 문장인 “무조건 될 거야”에는 보어가 없다. 열정도 있고 체력도 있지만 조금은 불안정한 20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다. 무엇이 될지, 자신을 비롯해 아무도 몰랐던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모호하던 미래를 향한 궤적은 조금씩 자리를 찾아간다. 언젠가 그가 직접 그 단어를 써 넣을 날이 올 것이다.

여성에 집중하고 선두하다 남궁현

남궁현 베이지크 대표는 대기업에 첫 출근을 한 2008년 어느 날, 자신을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가족을 위해 자부심을 갖고 일해온 직장을 그만둔 엄마에게 딸의 입사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83년생 김지영 세대가 졸업할 무렵, 기업들은 신입 채용에 여성의 비율을 어느 정도 의무화했다. 과거 여성들이 받은 차별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약소하나마 제도적 혜택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임원 중 여성의 숫자는 손으로 꼽았다. 임원이 된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자신을 아끼는 선배들마저도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라는 조언을 자연스럽게 말하던 시절, 상품 기획 파트에서 일하던 그는 입사 3년 차에 직장을 그만둔다. 여성이 많은 시장을 고민했다. 바로 화장품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화장품 회사가 로레알이라는 생각 끝에 그는 곧바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록시땅에 입사한 에피소드는 업계에서 조금 유명하다.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기적처럼 회신이 왔다. 단, 상품기획 업무는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니 프랑스어를 6개월간 완벽하게 마스터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치열하게 공부했어요. 꿈에 그리던 기회를 망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록시땅을 거쳐 이후 로레알 브랜드와도 인연이 되어 글로벌 시장에서 실무를 쌓는다.
4년 전 남궁현 대표가 비건 화장품 ‘베이지크’를 론칭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다. 한국에 비건 카테고리가 없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것. “프랑스에서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가 ‘너희는 트렌드만 있지, 브랜드는 없다’였어요. 참 듣기 싫었어요. 오랫동안 이어갈 성격을 가진 브랜드를 구상해야 했어요.” 동물성을 배제하는 일은 지구를 위해서도 필연적이다. 그의 선택은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론칭 이후 화장품 업계에 비건이 트렌드로 떠올랐다.
“화장품을 바르는 시간만큼은 세상과 단절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내게 집중하면서 손끝의 감각을 느끼며 만족감을 채우죠. 이젠 공감해주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그의 말에서 스스로 의지를 다져온 하루 하루의 끝을 상상할 수 있다. 명확한 목표와 실행 능력, 미래를 전망할 줄 아는 감각, 그리고 스스로 되짚어보는 반성은 브랜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현재 베이지크는 일본에 지사를 두고 있고, 코로나19로 미뤄둔 유럽 진출도 다시 진행하고 있다.
“가끔 매체를 통해 크리스틴 라가르드를 보면 무척 자극을 받아요. 그가 IMF의 총재였을 때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데이터를 가지고 말하는 그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를.”
사회가 만든 여성 직장인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 도전한 남궁현 대표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일상의 목표로 삼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 탄생할 여성 경영자들에게, 그 또한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모두’의 개념을 확장하고 품다 조윤희

마흔다섯. 해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행하는 ‘젊은 건축가 상’을 신청할 수 있는 최종 나이다. 수상자들은 대개 40대다. 젊어도, 상의 이름만큼 젊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무를 익히다가 이름을 걸고 건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늦게 무르익는 만큼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업이다. 조윤희 건축가가 자신의 뜻을 담은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가 홍지학 공동대표와 함께 구보건축을 개소한 2015년부터다. 2019년 11명의 1인 가구를 위한 궁정동 공동주택 ‘청운광산’이 좋은 평가를 받아 2021년 젊은 건축가 상을 받는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건축설계 디자인은 표면적으로는 사무직이다.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도면을 그리는 일이 주된 일이다 보니 남녀의 성비에 큰 차이가 없다. “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학생의 3분의 1은 여자였어요. 얼마 전에 참여한 모 대학 졸업전 평가에서 만난 학생 10명 중 9명이 여자였죠.” 건축에 디자인 개념이 없던 과거와 달리 건축 디자인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은 여성의 비율이 높아졌다. 전공 분야를 계속해 살리느냐, 결혼과 출산 후 커리어를 멈추느냐는 다른 사무직과 비슷한 상황이다. 젊은 건축가 상을 받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적은 이유도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다.
좁고 구불구불한 만리동 길목에 나지막한 벽돌 건물이 불을 밝혔다. 구보건축을 찾은 날은 그들에게 큰 프로젝트의 마감이 있던 날이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 사무실에는 세 가족이 남아 있었다. 올해 일곱살이 된 딸은 하원 후 인터뷰를 하는 엄마 옆에서 열심히 프린트한 캐릭터에 색을 칠한다. 건축사무소의 문을 열고 업을 쌓는 동안 아이도 함께 컸고 엄마는 젊은 건축가의 나이에서 벗어났다. 피부에 맞닿은 일상성을 지향하고, 사회적인 당위성을 품은 공공을 위한 건축을 구상하면서 구보건축의 철학은 더욱 단단해졌다.
공공에 관한 사유는 좀 더 섬세한 층위로 뻗어나간다. 지난해 공공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분류하지 않은 표식>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발표한 ‘N을 위한 화장실’은 디자인을 공유하는 대상과 개념을 확장시켰다. “당연하게 구분된 남녀 성의 표식 앞에 난감한 사람들이 있어요. 성소수자는 물론이고 성으로 나눌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하죠.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아들이 부축해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공중 화장실 앞에서 남자, 여자 표식만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을 계속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메시지를 담을 수 있었죠.”
‘청운광산’의 처음 디자인에는 층별로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어 있었다. 지금은 여성 전용 주택으로 운영된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공동주택에 사는 일은 공동화장실 문제만큼 어려운 일이다. 조윤희 건축가는 아이와 함께 다니는 공중화장실의 세면대가 너무 높다고 말했다. 세면대의 높이를 낮추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우리는 잘 모른다. 다수에게 편리하게 정해놓은 틀과 고정관념을 조금씩 비틀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건축가만 해도 언론이나 건축가 상을 통해 남자의 직업이라는 선입견이 있지 않았나. 딸아이의 세상에는 ‘여성 건축가’라는 표현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는 조윤희 대표의 평소 생각은 그가 발표한 건축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것이 조윤희라는 건축가의 직업적 소명이다.

정다운 작가의 작품은 3월 3일부터 5월 31일까지 롯데백화점 본점 4~6층 아트월의 3인전 <Better, Together>에서 만날 수 있다.

한계 없는 정원을 가꾸다 정다운

색색 하늘하늘한 옷감을 캔버스에 늘리고 겹친다. 우리가 사는 도시 풍경을 옷감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구상화와 추상화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패브릭 드로잉’. 정다운 설치미술가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큰 뜻을 품고 입학한 대학원에서 유화와 아크릴로 기존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그는 유일한 자신만의 방식을 옷감에서 찾았다. 처음에는 옷감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천 자체에도 색과 패턴이 있었다. 굳이 물감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 붓을 버리고 천을 들자 표현은 더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독창적인 작품 세계는 국내외로 아름답게 뻗어나갔다. 패브릭 드로잉은 캔버스 프레임 밖으로 나갔을 때 더 과감하고 독창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그런데 대형 설치 작업을 할 때마다 작품보다 시공과 설치 방법에 대한 더 많은 설명과 사례를 제시하는 과정이 생겼다. 작가가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작업을 위해 운동과 명상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생기는 해프닝이다. 내면이 강한 여성들을 선망한다는 작가는 타사 튜터를 언급했다. “외면이라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특별한 동화책과 30만 평의 정원이 타샤의 진정한 모습이었어요.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창조하고 집중한 그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빛과 바람을 이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찾은 ‘패브릭 드로잉’은 작가의 의지로 또다시 확장된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새 작품이 설치될 전북 도립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벽면 폭이 22m, 층고가 6m나 된다. 작품이 커질수록 설렘이 증폭된다. 작가의 눈은 반짝였다. 꿈의 크기는 물리적인 한계를 늘 타고 넘는다.

김남욱 전문의의 리조이스 클래스는 3월 8일부터 열린다. 롯데문화센터 홈페이지에서 2월 22일부터 선착순으로 신청할 수 있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바라보다 김남욱

아이는 엄마 배 속에서 열 달 자라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도 성인이 되기까지 최소 10여 년이 필요하다. 누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라는 존재. 그것도 육체와 정신 모든 방면에서 양질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 이런 동물이 없다. 그래서 어른들의 역할이 크다. 학생 때부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던 김남욱 정신과 전문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괴로워하는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결국 성장 과정과 부모의 관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함을 깨닫는다. 정신과 전문의의 길로 들어섰을 때, 망설임 없이 소아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았던 이유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레지던트 생활을 거치며 전문의가 되는 동안 김남욱은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남자에게 힘든 일을 부탁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택했던 청소년 김남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매우 독립적인 그를 단번에 무너뜨린 인생의 사건이 있었다. 임신이었다. “임신하고 내 자신이 신체적으로 약자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출산 휴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여자가 되지 않으려면 임신을 안 해야 하나 까지 생각했죠.”
그는 정신과 이론 중 ‘체계 이론’을 설명해주었다. 사람을 개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안에서 바라보는 것. “만약 모든 여자가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당한 선택을 하게 되면 인류는 존속할 수 없어요. 여자가 개인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훨씬 이득인 셈이죠. 그 희생만큼 사회 체계가 개인을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믿음을 줘야겠지요?”
김남욱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점점 사회운동가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 성의 구분이나 성 역할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화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남자와 여자는 뇌 구조부터 다르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성차별을 막기 위해서, 남녀는 다르지 않다,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남욱은 임신과 출산을 거쳐 육아를 하며 매우 행복하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어느덧 아들은 자라서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학교생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를 찾아 상담 오는 많은 부모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를 보면, 부모도 상담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요. 진단명이 있어야 하는 병원은 상담의 문턱이 높죠. 개인적으로 상담소를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이번에 롯데가 리조이스 캠페인을 통해 기회를 열어주셨어요. 벅찬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ditor
HAN JI HEE
Photographer
O TAE 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