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HEME

살아있는 패션의 전설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패션계 전설의 여인들

요즘 모두의 관심사는 MZ세대다. 기성세대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종, 외계인만큼이나 낯선 존재로 여기며 이들을 궁금해하지만, 정작 이 젊은이들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에 매료되곤 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문화에 열광하며 빈티지 아이템을 찾아 헤매고, 과거의 패션이 쿨하다고 여긴다. 지난해 말 세상을 뜬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Z세대 사이에서 다시 인기를 누리며 81세의 나이에 세 번째 전성기를 맞던 차였으니 말이다.
펑크의 여왕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과거를 간직한 채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아직 패션계에 남아 있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역사의 일부인 동시에 가장 동시대적인 인물이다. 이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과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의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혹은 나이가 든 후에도 패션계에서 활약하는 다섯 명의 아이코닉한 여성을 조명한다.

Kusama Yayoi. instagram @yayoikusamamuseum

쿠사마 야요이 KUSAMA YAYOI
쿠사마 야요이는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중요한 여성 생존 작가’다. 2018년 로스앤젤레스의 더 브로드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을 때 반나절 만에 티켓 9만 장이 팔렸으며, 2020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가 열렸을 때는 1년치 티켓이 몇 분 만에 완판되었다(코로나로 전시 기간이 연장된 후에도 다시 완판되었다). 야요이의 작품 가치는 최근 10년간 로켓처럼 치솟았다. 호박 조각 작품과 물방울무늬 페인팅, 관객 몰입형 설치물인 무한 거울방은 소셜 미디어 시대에 가장 ‘포토제닉’하고 ‘인스타그램에 적합한’ 예술 작품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올해 93세인 미술계의 록스타는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거주하며 낮에는 길 건너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병원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1977년에 자신의 의지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명료하고 논리 정연하며 어떤 젊은 예술가보다도 침착하지만 자신의 정신 상태를 작품 세계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가 처음 환각을 경험한 것은 7세 무렵, 제비꽃이 사람처럼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다.
“하루는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천장, 창문, 벽이 온통 그 무늬로 가득했어요. 나중에는 방 전체와 내 몸, 온 우주까지 빨간 꽃무늬로 뒤덮였죠. 내 자신이 사라지고 끝없는 시간의 무한함과 공간의 절대성 속에 회전하며 무의 존재로 소멸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The Moving Moment When I Went to the Universe’ 페인팅 앞에 앉아 작업 중인 쿠사마 야요이.

성인이 된 후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녀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쫓기듯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물망을 반복해서 그린 ‘무한 그물망’ 페인팅으로 미니멀리즘과 팝아트 신에서 주목받았고 물방울무늬, 남근 형태의 연성 조각, 무한 거울방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동료로 지내던 동시대 유명 남성 작가들(앤디 워홀, 클라스 올든버그, 루카스 사마라스 등)이 그녀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작품으로 더 높이 평가받은 것은 큰 상처로 남았다.
그녀의 작업은 페인팅과 조각, 설치 작품, 히피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행위 예술과 비디오 아트를 넘어 패션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자신의 작품과 매우 유사한 디자인의 옷을 발견하고서 제조업체를 찾아가 동업을 제안한 것이다. 1965년 ‘쿠사마 패션 컴퍼니’를 설립해 패션쇼를 열었고 대형 백화점 바이어들이 주문을 넣기 위해 몰려들었다. 엉덩이나 가슴, 성기가 드러나도록 구멍을 뚫은 실험적인 디자인보다 물방울무늬의 상업적인 옷이 더 인기 있었지만, 당시 미국 전역 400개 의류 매장에서 그녀의 옷이 팔렸다. 쿠사마 패션 컴퍼니는 1973년 그녀가 미국을 떠나면서 운영이 중단되었다. 정신적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스물여섯 살 연상의 아티스트 조지프 코넬이 1972년에 사망하자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자살 시도 후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정신 건강을 이유로 1970~1980년대 예술계와 대중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작업을 놓지 않았다(“예술 작업이 없었다면 난 오래전에 자살했을 거예요”). 그리고 1993년, 64세의 나이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며 아트 신에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일명 ‘쿠사마 붐’이 이때 시작되었다. 그녀의 과거 작업이 재평가되는 동시에 호박과 아메바 형태를 모티프로 한 새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전시가 줄을 이었고 야요이는 높아만 가는 자신의 명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 최고의 시기입니다. 난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길 원해요.” 과거 야요이는 여성 작가, 외국인,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 출신으로 뉴욕 아트 신에서 차별받았고 관심과 유명세를 갈구하는 관종으로 조롱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그녀를 조롱하지 못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걸쳐 그녀는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2005~2006년에 완성된 아이코닉한 스타일은 그녀 자신을 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광택 나는 빨강 가발, 깔맞춤 한 빨강 립스틱과 볼그족족한 블러셔, 검정 아이라이너, 물방울무늬 시프트 드레스는 강렬하고 캐릭터 같은 인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실제로 전시 작품과 동일한 패턴의 의상을 입어 작품의 연장선을 자처하기도 했다. 용의주도하게 완성된 이미지로 쿠사마 야요이는 70대의 나이에 패션 아이콘이라는 또 하나의 명성을 추가했다. 2006년 당시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가 야요이의 도쿄 아티스트를 방문한 일은 그 명성을 뒷받침해줄 사건이었다. 제이콥스가 선물한 루이 비통 엘립스 백에 야요이가 물방울무늬를 그려 넣으면서 2012년 첫 번째 루이 비통×쿠사마 야요이 캡슐 컬렉션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 밖에도 아우디, 랑콤, 코카콜라, 뵈브 클리코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그녀는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식을 줄 모르는 야요이의 인기에 루이 비통은 올해 초 더 큰 규모의 두 번째 루이 비통×쿠사마 야요이 컬렉션을 발표했다. 도쿄 루이 비통 매장 쇼윈도의 쿠사마 야요이 로봇은 9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력과 부릅뜬 두 눈의 초현실적인 그녀 그 자체다.

Carmen Dell’Orefice. instagram @carmen_dellorefice

카르멘 델로레피체 CARMEN DELL’OREFICE
카르멘 델로레피체는 2008년에 세상에서 가장 긴 경력을 가진 런웨이 모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1948년 15세의 나이로 미국 <보그> 커버에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쭉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중간에 잠깐 은퇴한 시기도 있지만 운명은 그녀를 런웨이와 카메라 렌즈 앞으로 다시 이끌곤 했다. 가장 비참한 생활부터 가장 호화로운 순간까지 모든 걸 경험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91세 모델의 커리어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어쩌면 살면서 모델 일을 가장 즐기고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 “내 삶의 좌우명은 ‘스스로 즐기자’랍니다.”

1931년 뉴욕에서 태어난 델로레피체는 부모의 계속된 다툼과 불화로 위탁 가정과 친척집을 전전해야 했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13세 때 류마티스열을 앓고 근육이 다 빠진 채 키만 훌쩍 자라버려 발레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첫 모델 일은 15세 때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길에 사진가의 아내에게 사진 모델을 제안받은 것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친척의 소개로 미국 <보그>와 모델 계약을 맺으면서 정식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호스트 P. 호스트, 세실 비튼, 어빙 펜, 노먼 파킨슨, 리처드 아베돈 등 20세기 최고의 사진가들과 작업했지만 모델 시급이 낮고 가정 형편은 어려웠기에 영양실조와 악성 빈혈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녀를 촬영할 때면 헐렁하게 남아도는 드레스의 뒷부분을 핀으로 잡아 고정하고 휴지를 뭉쳐서 볼륨을 연출해야 했을 정도. 나중에는 나이가 찼는데도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호르몬 주사를 맞고 몸매에 곡선이 생긴 후에야 모델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델로레피체는 21세, 28세, 32세 때 총 세 번 결혼했다. 두 번째 결혼했을 때 은퇴를 결심했고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한 후 생계를 위해 47세의 나이로 런웨이에 복귀했다. 20여 년 만의 귀환이었지만 놀랍게도 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그녀를 찾았다. “내가 40대일 때 내 모습은 40대였어요. 20대인 척하고 싶지 않았죠. 난 언제나 나 자신을 연기했습니다. 그 순간의 내 모습을 반영했죠. 그렇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카메라 앞에서 늘 멋지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복귀 후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타겟과 롤렉스 광고, 패션 매거진에 등장했고 티에리 뮈글러, 장 폴 고티에, 존 갈리아노, 에르메스, 알베르타 페레티 등 주요 디자이너의 런웨이에 섰다. H&M, 세포라도 그녀를 찾았다. 2011년에는 모델로서 패션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런던 예술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10대 때 촬영한 사진. 카르멘 델로레피체는 194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패션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델로레피체의 커리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꽃을 피웠다. 60대 이전에 촬영한 매거진 커버의 수보다 6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찍은 매거진 커버가 훨씬 많을 정도. 과거에는 수요가 없던 시장, 즉 노년과 백발을 타깃으로 한 시장의 대표 주자이기에 모델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매일매일을 즐기며 살고 있고 일은 그 일부다. “우리는 매일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죠. 과거를 통해 배움을 얻으면서 움직이는 시곗바늘처럼 계속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거예요.”
지난해에는 91세의 나이로 누드 화보를 찍었는데, 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어렵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정받는 사진가와 한 작업인걸요. 나한테서 무엇을 보는지는 사진가의 몫입니다. 우리는 촬영을 위해 모였고 시너지가 일어나면 사진가가 그걸 끌어내는 거죠.” 이 모든 것들이 나이 들수록 그녀를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만든다. 스스로를 정체성 없는 모델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세월은 그녀를 모델 이상의 존재로 만들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커리어는 더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활동해온 모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유지해왔다고 말할까? “아기를 돌볼 때 하는 일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기르고 먹이는 거죠. 그게 우리가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보살피고 사랑하고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

Iris Apfel. instagram @iris.apfel

아이리스 아펠 IRIS APFEL
아이리스 아펠이 처음 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건 2005년, 84세의 나이였다. 당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큐레이터였던 해롤드 코다는 계획돼 있던 전시가 갑작스럽게 취소되자 급하게 아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의 코스튬 주얼리 컬렉션으로 전시를 열기 위해서였다. 대중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류층과 일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파격적이고 화려한 스타일의 그녀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결과적으로 주얼리뿐 아니라 다채로운 의상 컬렉션까지 포함한 전시 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의상 연구소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독창적인 미국인이라 할 수 있는 아이리스 아펠은 패션과 텍스타일, 인테리어 디자인계에서 지난 40년간 가장 쾌활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위트 있으면서도 화려하고 특이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수립해왔다.”

2018년에 출간한 자서전 <아이리스 아펠: 엑시덴탈 아이콘>에 실린 사진. 패션만큼이나 집의 인테리어 역시 맥시멀하다.

1921년, 뉴욕 퀸스에서 태어난 아펠은 패션에 대한 첫 기억으로 할머니의 방대한 원단 조각 컬렉션을 꼽는다. “할머니가 원단 가방을 열 때마다 내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곤 했어요. 온갖 컬러와 패턴의 천 조각으로 가득했고 양도 어마어마했죠. 그 놀이 덕분에 원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0대에 칼 아펠과 결혼해 함께 직물 회사를 시작한 그녀는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부터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까지 9명의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 인테리어 디자인에 사용할 원단을 제공하고 가구를 복구하는 일을 했다. 미국 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원단을 찾아 정기적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동, 인도, 아시아로 출장을 다녔는데, 이국적인 의상과 수공예, 빈티지와 앤티크에 매료되어 전 세계 곳곳에서 옷과 액세서리를 사 모으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당대 유명 디자이너 의상에 튀르키예,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 구한 아이템을 매치해 요란한 차림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거의 평생 이어져온 것이다.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차려입어요. 철저하게 나를 위한 거죠.” 물론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들의 문제지 나와는 상관없으니까요. 그리고 내 스타일은 지금까지 매우 반응이 좋았답니다.”

지난 2021년 뉴욕 센트럴 파크 타워에서 열린 100세 생일 파티에서 참석한 이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 사진.

2005년 전시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는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맥 코스메틱, H&M을 비롯한 여러 패션 뷰티 브랜드와 협업하고 홈쇼핑 브랜드를 론칭했으며 자동차와 아이스크림 광고에도 출연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지자 마텔사는 2018년 아이리스 아펠을 모델로 한 바비 인형과 그녀가 스타일링한 판매용 바비 인형 출시를 발표했다. 이 모든 일이 정신없이 일어나는 동안 어느새 그녀는 100세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거나 나를 알아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미술관에 내 옷과 액세서리가 전시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코스메틱 브랜드의 모델이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녀는 어떤 것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100세가 넘은 지금도 그녀의 활동은 진행 중이다. “흥미롭거나 재미있어 보이면 일단 뛰어들었어요. 걱정은 나중에 했죠.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힘이 듭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기술을 습득하고 두려움을 뿌리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죠. 대부분의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요. 그 편이 훨씬 쉬우니까요. 하지만 재미있지는 않을 겁니다.”

Linda Fargo. instagram @lindafargo

린다 파고 LINDA FARGO
뉴욕으로 여행을 간다면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윈도 디스플레이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몇 안 되는 백화점 중 한 곳, 뉴욕 랜드마크의 시각적 정체성을 수립하는 이가 바로 린다 파고다. ‘버그도프 굿맨의 눈’으로 알려진 그녀는 2006년부터 이 백화점의 패션 오피스 및 스토어 프레젠테이션 상무 역할을 맡고 있다. 트렌드를 포착하고 디자이너 쇼룸을 방문하고, 신진 디자이너와 레이블을 발굴하고 윈도 디스플레이와 내부 인테리어를 감독하고 새 프로젝트를 기획한다(아마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업무가 더 있을 것이다). 이 고급스러운 백화점에서 패션과 관련된 일 중 그녀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마디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이 백화점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수백만 달러가 좌우된다.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매우 역동적인 업무입니다. 본능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경영자가 되어야 하죠.” 파고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가 내 일이 패션과 윈도 디스플레이에만 관련된 업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 넓은 관점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이 다르고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예상치 못한 재미와 계획이 공존한달까요.”

린다 파고는 멋진 스타일로 스트리트 사진에도 자주 등장하는 패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커리어는 윈도 디스플레이다. 대학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한 후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에 취직한 그녀는 윈도 디스플레이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꿈의 장소였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 입사해 그동안 그녀가 기획한 윈도 디스플레이는 1천 개가 넘는다. 고상하고 섬세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흥미로운 주제와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절충한 디스플레이는 버그도프 굿맨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쇼윈도의 유리를 부순 적이 있죠. 생각해보면 그 동안 갇혀 있던 무언가를 깬다는 은유적 표현이었습니다. 의자 7개를 쌓아 올리고 마네킹에 발렌티노의 레드 드레스를 입혀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올렸어요. 중심을 잡기 위해 팔을 앞뒤로 펼쳤는데, 한쪽 손의 손목을 떼어내 윈도 바깥쪽에 붙였죠. 실제로 유리를 통과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입니다.”
윈도 디스플레이만 고집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파고는 윈도 디스플레이의 연장선으로 매장 내부 인테리어를 지휘하는 스토어 디자인 디렉터 직도 겸임하고 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포지션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팔을 걷어붙였고 공식적으로 내 책임이 된 거죠.”

이렇듯 패션계 내부에서 린다 파고가 버그도프 굿맨과 이음동의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대부분의 패션 인플루언서와 다른 점이다. 그녀의 취향이 어떤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부는 소셜 미디어가 아닌 백화점 자체가 입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17년에 그녀의 20년 근속을 기념해 숍인숍 ‘린다의 버그도프 굿맨(Linda’s BG)’을 오픈한 것도 그 증거다. 물론 지금 입은 옷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은 것도 한몫했다.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았어요. 백화점에 나만의 매장을 갖는 걸 늘 꿈꿔왔으니까요.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공간 말입니다.”
이 매장에는 언제나 레드 립스틱과 입술 모티프 아이템이 있다. 새빨간 레드 립스틱과 은발 보브 헤어는 그녀의 시그너처 룩이다. 립스틱은 립 라이너 없이, 클래식한 레드 컬러를 고집한다. 단발은 40대 때 자른 이후로 65세인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녀의 머리칼을 진줏빛이라고 처음 말해준 이는 디자이너 알베르 엘바즈다. “그때부터 진주를 좋아하게 되었죠. 매일 바로크 진주 귀고리를 착용한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겉모습을 꾸미는 데 더 이상 안달복달하지 않으려 한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해야 할 일 그 이상을 하는 것이다. 도움이 될 만한 일을 먼저 찾아서 했기에 패션계에서 그녀의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다. “지금도 나는 매장 운영과 콘셉트 숍을 기획하는 것 외에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죠. 다음 커리어의 시작이 될 겁니다.”

Suzy Menkes. instagram @suzymenkes

수지 멘키스 SUZY MENKES
수지 멘키스는 21세기 가장 저명한 패션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이다. 자국인 영국에서 패션 저널리즘으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에서는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피렌체의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피렌체 최고 훈장인 피오리노 도로를 수상했다. 살아 있는 아이콘인 그녀는 패션계에서 57년째 활동 중이다. 여전히 앞머리를 봉긋하게 말아 올린 모습으로 부지런히 패션쇼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특유의 강렬한 눈빛으로 백스테이지에서 디자이너에게 질문을 던진다.

1943년생 멘키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전공하고 3학년 때 교내 학생신문의 첫 여성 에디터가 되었다. 24세에 첫 직장인 <이브닝 스탠더드>에서 패션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데일리 익스프레스> <더 타임즈>를 거쳐 44세 때 <헤럴드 트리뷴>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칼 라거펠트, 이자벨라 블로와 맞먹는 패션계 셀럽이자 파워풀한 패션 비평가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1년에 20만 단어 이상의 기사를 써냈으며 거침없는 비평으로 ‘사무라이 수지’라고 불렸다. 디자이너 알베르 엘바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지는 멋진 컬렉션을 선보이면 만족하지만 컬렉션이 신통치 않을 때는 화가 나서 거의 분노하죠.”
2001년에는 존 갈리아노의 디올 컬렉션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가 LVMH 그룹에서 지방시 쇼에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다. 패션계 전체가 들썩였지만 멘키스는 꽤 담담했다. “잘 알다시피 나한테 처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1990년대에도 똑같은 이유로 지안프랑코 페레 쇼와 베르사체 쇼에 입장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
패션을 좀 더 넓은 맥락과 관점에서 접근한 점 또한 패션 저널리스트로서 존경받은 이유다. 2013년, 그녀가 쓴 두 편의 기사는 패션계에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쇼장 앞에서 스트리트 사진가에게 어필하려 애쓰는 패션 블로거들이 패션위크를 장악했다는 기사와 연간 패션쇼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디자이너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기사였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앞장서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이슈였기에 멘키스가 공론화하자마자 사람들은 자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평생을 패션 저널리스트로 활약해온 수지 멘키스는 패션계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아이코닉한 존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데에는 독특한 스타일도 한몫했다. 그녀는 어딜 가든 퐁파두르 스타일 앞머리를 고수하는 걸로 유명하다. 이마 위로 동그랗고 봉긋하게 말아 올린 앞머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거리를 걸을 때도 신기할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기사를 쓸 때 앞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스타일링한 것이다.
일찍이 플리츠 플리즈를 즐겨 입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구겨지지 않고, 호텔에 다림질을 맡길 필요도 없어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멘키스는 ‘내 옷도 나만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즐겨 표현한다. “다림질이 다 됐을 땐 난 이미 호텔을 떠나고 없을 겁니다. 그게 세상이 변화하는 방향이자 속도니까요.” 그녀는 25년간 일한 헤럴드 트리뷴에서 업계 최초의 럭셔리 콘퍼런스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패션 산업이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점인 2014년,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션의 온라인 에디터로 이적해 2020년 컨데 나스트를 떠날 때까지 전 세계 보그 웹사이트에 리포트를 연재했다.
더 이상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진 않지만 여전히 그녀는 쇼장을 누비며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리뷰를 올리고, 팬데믹 기간에 론칭한 팟캐스트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올해 79세인 멘키스는 55년 전, <이브닝 스탠더드>에 입사했을 때 정보를 습득해서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역할임을 배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와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그저 블로그나 운영하면서 은퇴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은퇴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에너지가 많이 남아 있거든요.”

Freelance Editor
KIM JI 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