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몸으로 전하는 이야기

몸에서 배우는 여성들에 관하여

동시대의 현대미술에서 각각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 신체성에 관한 개념이 자주 전용된다. 새롭고 어려운 사유의 세계 같지만, 사실 이것은 지난 세기 동안 조금씩 다른 언어와 방식을 경유하며 꾸준히 사용되어온 미술사적 개념이다. 1920년대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순수조형은 그 무엇도 재현하거나 암시하지 않는 조형 자체를 드러내며 작품과 관객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관계를 맺게 했다. 19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은 미술 경험의 주체를 작가에서 대상으로 전환하여 특정 맥락을 소거한 채 오로지 사물 자체에서 인체의 현전에 관한 사유를 촉구했다. 미니멀리즘은 관객의 위치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작품을 경험하는 층위로 확장하면서, 이후 작가의 지적 사유를 시각적 기호로 전환한 개념미술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미술사에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객체로서 작품의 특질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경험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미술은 이처럼 특정 장소에 존재하는 작품, 작품이 보여지는 장소와의 상호 관계성, 그리고 작품과 공간을 직접 경험하는 관객 모두를 의미한다. 여기서 몸은 미술적 과정을 이끄는 매개자이자 매체를 의미하는 복수의 미디어가 된다.
신체의 개념을 다루는 여성 미술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유하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읽는 방법들을 제시해왔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체의 형태를 재현해 대면하게 하고, 몸이라는 유기물을 자연, 사물이나 타인에 빗대어 관점을 전환하는 식이다. 나아가 이 작품들은 가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과의 추상적 관계를 열어주는 구체적인 통로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추함을 통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강조하듯이, 암울한 현재를 직시하며 더 나은 미래를 암시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예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 미디어에서 미래 시제들을 생각해보면 각자가 처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마법 같은 구원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몸에서 배우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알고 경험하면서 우리는 닿을 수 없이 높고 먼 곳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마치 중력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느낀다. 이들은 인간이 지구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 준다.

물류창고(Temporary Storage), 디지털 C-프린트, 140×168cm, 2010. © JOO HWaNG

JOO HWANG
주황


주황은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해 사진을 배우고 작업하다가 2010년대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는 미술가다. 작가는 그동안 풍경과 초상을 오가며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서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그동안 재현된 이미지들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아시아인, 한강 시민공원에서 만난 청소년, 화장품 광고물의 미학을 전유한 여성의 초상, 공항 출입국장의 사람들, 도시의 감정노동자, 조선족과 재일 조선인 동포가 부르는 민요, 한 여성공동체의 여가 활동 등을 담는다. <물류창고(Temporary Storage)>(2010) 연작은 언뜻 몸의 재현과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보인다. 21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처음으로 작업한 창고 연작은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흔히 볼 수 있는 임시 창고들을 정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조금씩 다른 형태와 구조를 띤 이 가건물들은 지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물류의 현주소는 물론이고,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운송 노동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직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무미건조한 구성과 달리 이미지는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매우 신체적인 개념을 구축한다. 각각의 프레임은 중앙에 선 창고를 중심에 두고, 그 곁으로 도시 변두리의 아파트와 논밭이 뒤섞인 풍경을 암시한다. 극도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창고로 상징되는 여러 의미 체계에서 벗어나 창고라는 사물이 가진 형상과 물질만을 보게 된다. 사회·역사적인 배경을 소거한 임시 창고의 초상은 아이러니의 미학을 경유하여 예기치 못한 관계를 도출한다. 작품은 우리를 재현된 풍경 너머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한국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서울 변두리 창고에서 지난 기억과 재회하며 성장하는 현재의 나를 만나게 한다.

자유낙하, 에치젠 고조 기즈키 종이에 요판 인쇄, 포토그라비어, 에칭, 드라이포인트, 84.5×106.7cm, 1994.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제작. © Kiki Smith

KIKI SMITH
키키 스미스


페미니즘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키키 스미스는 오랜 시간 여성의 신체를 해부학 관점으로 접근해왔다. 지난 40여 년간 작가는 칼과 매스 대신 종이와 잉크로 판화, 드로잉, 태피스트리,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우리의 몸을 재현했다. 일찍이 가까운 가족이 병으로 죽는 가슴 아픈 경험을 한 작가는 신체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작업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존엄에 관한 인간 보편의 정치성을 인지하게 된다. 여성의 인체는 물론이고 심장, 가슴, 자궁, 안구, 피부와 근육, 손, 소화계, 배설물, 털은 그의 이미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다. 이들은 단일한 개체로 도려내어져 각각의 개별성을 보여주고 생명과 소멸에 관한 지각의 경로를 마련한다. 키키 스미스의 예술관을 이끄는 또 다른 요소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화와 신화를 재해석한 새로운 서사의 구성이다.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빨간 모자 소녀와 늑대,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알레고리가 되는 여성 캐릭터, 날짐승과 알은 작가의 새로운 주목을 받으며 전혀 다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세상을 구축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진 ‘탄생(Born)’(2002)은 표면적으로 전통적인 조각의 재현 방식을 고수하지만, 조각이 구현하는 서사의 새로움은 작품을 감상하는 위치에서 경험하는 층위로 움직이며 전혀 다른 방식의 지각으로 나아가게 한다. 조각은 사슴에게서 태어나는 성인 여성의 누운 몸을 보여주는데, 매우 보편적이고 온전한 여성의 나체가 너무나도 편안하게 짐승에게서 태어나는 순간을 멈춘 것 같은 이 장면은 인간이라는 굴레 밖에서 신체를 인지하고 감각하게 한다. 짐승에서 인간까지 횡단하는 몸의 개념은 인간을 우위에 두지 않는 생태적인 사고방식은 물론이고, 지극히 물질적인 몸의 취약함을 딛고 초월적인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깊은 욕망의 발현과도 같다.

큐빗 투 아담(qbit to adam),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1. © HONG CHeoL KI

CHOI CHAN SOOK
최찬숙


신체성이라는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가 최찬숙은 여러 장소와 역사에서 교차하는 몸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재구축한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하는 몸의 상태는 특정 공동체에서 ‘밀려나고 새어 나와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구체적인 층위에서 이주자의 몸에 각인된 떠나온 장소의 기억이나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지어진 군사경계선 근방의 민북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이고, 관념적인 층위에서는 아시아 근대사에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는 복수의 위치들이나 가상현실 속 아바타의 불완전한 신체, 혹은 여러 갈래의 현실을 새로운 가치로 전환한 암호 화폐다. 추상적인 층위에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의 이미지, 그리고 그 아래서 발견된 미라가 거쳐온 시간들이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표한 근작 ‘큐빗 투 아담(qbit to adam)’(2021)은 칠레의 아타카마사막에 중첩된 채굴 풍경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모순에 관한 서사를 복합적인 설치 환경으로 옮겨와 감각적 단위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비디오 설치로 구성된 이 작품은 세계 최대 규모의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과 전 세계 우주 데이터 수집 안테나가 모여 있는 알마 기지, 그리고 고원지대에 설치된 안테나 주변으로 태양을 향해 자라나는 풀 형상을 경유하여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몸의 존재를 드러낸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사선으로 걸린 스크린에 투사된 사막의 표면이 그리는 추상의 면들을 마주하고, 이것이 바닥에 반사되면서 무한히 확장하는 패턴에 둘러싸이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각적 요소와 더불어 개인사를 구술하는 할머니들의 음성이나 온풍기가 발산하는 온기는 추상의 공간에 특정 시간을 접속하며 보다 입체적인 경험의 층위를 형성한다. 작품 제목이 지시하듯이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의 정보들은 양자비트로 변환되어 인간 탄생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것이다.

투왈 드 주이 패브릭으로 단장한 침대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침실.

TORKWASE DYSON
토크와세 다이슨


미술에서 신체성을 경유하며 인식할 수 있는 타자의 범주는 지구상의 다양한 인종과 거기에 연루된 복잡한 역사까지 아우른다. 토크와세 다이슨은 조각과 회화를 주요 매체로 작업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다.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자라 현재는 뉴욕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작가는 현실 세계의 생태, 지질과 건축적 구조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법으로 추상적인 형태의 조각과 회화를 소개한다. 그의 작품은 많은 경우 설치되는 장소의 환경 조건과 상호 작용하며 신체성과 소속감에 관한 사유의 경로를 마련한다. 특정한 서사 없이 검은 기하학 형상에 선이 더해지면서 구성되는 추상성이 가진 힘은 고유의 개념을 구축하는 엄정하고 형식적인 과정에 있다. 특유의 에너지로 특정 공간을 강렬하게 점유하는 그의 작품은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드러내고, 잠재적인 움직임과 새로운 사고방식을 이끌어낸다. 2019년 발표한 작품 ‘나는 그 거리에 속한다(I Belong to the Distance)’(2019)는 아랍에미리트의 어느 반도에 설치한 장소 특정적 조각으로 지구상의 다른 인종, 젠더, 역사와 환경 간의 ‘거리’라는 개념을 신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철로 된 마름모꼴 직육면체 구조물을 직선으로 연결해 쌍을 만드는 형상 세 개로 이루어진 조각을 정면에서 보면 6개의 기념비를 그려낸다. 조각이 설치된 장소는 오만 만과 그 너머의 인도양으로 연결된 습지에 면하는 곳으로, 수백 년 전 아프리카인을 실어 나르던 노예 무역선이 드나들던, 그리고 오늘날 온갖 사연을 가진 난민이 이동하는 바닷길을 바라본다. 한쪽 면이 열려 있어 세워진 상자와도 같은 조각의 형상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노예해방에 연루된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는 공간으로도 전환된다. 고개를 숙여 이 추상의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위와 옆면에 길쭉한 선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은 비밀스럽게 몸을 숨길 수 있을 법한 닫힌 공간이면서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해의 위치에 따라 움직이며 시간을 감각하고 자연을 측정하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샤르자 비엔날레 14 개막식에서 초연된 안무는 지난 시간 인류가 행한 억압과 폭력을 기억하며 조각의 형상에 반응하는 몸짓이었다. 토크와세의 작품은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자들이 겪는 변위의 시간에 신체성을 부여하며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드러낸다.

기념비(Monolith), 기록영상 스틸, 2002. © IKKIBAWIKRR

IKKIBAWIKRR
이끼바위쿠루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계로서 몸은 그것을 인지하는 개념적 사유를 통해 내가 아닌 타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이끼바위쿠루루는 조지은, 김중원, 고결로 구성된 한국의 미술가 그룹이다. 그룹명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들은 이끼나 바위처럼 지구상에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읽으며 다른 방식의 관계 맺음을 보여준다. 주로 드로잉, 텍스트, 사진, 퍼포먼스와 워크숍 형태로 구성되는 이들의 작업은 소수자와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고 사라지는 방식을 주목하며, 이 문제에 관한 새로운 발화를 만들어왔다. 노동자 인권 문제, 재개발을 둘러싼 식물의 이식, 인도네시아, 제주, 미얀마, 괌, 팔라우처럼 태평양 연안의 섬에서 공통으로 목격하는 근대사의 기억, 땅의 소유나 임시적인 공간의 상태는 그동안 작가들이 탐색해온 주제들이다. 오랜 리서치를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의 사람을 만나고, 서로 알아가며, 이해의 깊이를 구축하는 이들의 작업은 수십 년간 지속되는 만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기록에 기반을 둔다. 이런 기록이 때로는 함축적인 퍼포먼스가 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마을 잔치, 강강술래, 연날리기처럼 몸과 몸이 만나 이루어지는 모임부터 맥락이 모호한 물건을 땅에 묻는 알 수 없는 몸의 행위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그중에서 ‘기념비(Monolith)’(2022-현재)는 쓰레기가 섞인 흙으로 만든 이름 없는 기념비를 만드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나무 합판으로 만든 직육면체 형태의 거푸집에 쓰레기가 섞인 흙을 담고, 방망이로 두드리는 행위를 며칠간 반복한 후 거푸집을 떼어내면, 작고 이름 없는 기념비가 세워진다. 곧 부숴질 이 연약한 기념비를 구성하는 흙은 미술보다는 일상의 공간에 훨씬 가까운 삶의 재료이자 죽음의 장소다. 우리는 논이나 맹지, 도시의 옥탑과 전시장처럼 특정 공간에 흙으로 세워진 임시 기념비를 경험하며 유한한 신체성을 떠올리게 된다. 기념비가 기념하는 건 사라지고 버려지는 우리 존재 모두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Writer
권진(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프로젝트 디렉터)